고통이라는 단어가 근원적이고 추상적인 정동을 대표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일상에서 누군가의 고통이 드러나는 순간은 언제나 구체적이다. 병원은 아마 그런 현장성이 가감 없이 직시되는 공간일 것이다. 여기 뇌전증이라는 질환이 있다. 간질 발작으로 알려진 이 병은 뇌의 신경회로에 심각한 교란을 일으켜 그 지배를 받는 근육과 힘줄 등이 동시다발적으로 수축 및 경련하는 위험한 상황을 만든다. 소아부터 뇌졸중 후유증을 겪는 노인에 이르기까지 국내에만 약 30만명의 유병률을 보이는 이 병은 발작의 양상뿐 아니라 지속 시간 역시 대응에 중요하다. 발작이 길어질수록 뇌 손상은 깊어지고 생명도 위태로워지기 때문이다. 원인은 다양하지만 이러한 이유로 응급 상황 시 대응 원리는 동일하다. 요컨대 골든타임 내에 발작을 멈추게 하는 조치가 최우선이다.
여기서 1차적으로 사용되는 약제가 일명 로라제팜(상품명 아티반)이다. 이 약은 오랜 기간 효과와 안전성이 입증돼 응급필수의약품으로 분류된다. 뇌전증으로 인한 급성 발작이 일어날 수 있는 응급실과 중환자실, 신경과 및 정신과 병동 등에 늘 구비돼야 하는 약이다. 또한 뇌전증뿐 아니라 알코올 환자의 금단섬망증상, 외상성 뇌손상 환자의 진정작용 등에도 널리 활용된다. 이러한 중요성 때문에 정부 역시 이 약을 퇴장방지의약품으로 지정해 관리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 위기 상황에 꼭 필요한 이 약이 현장에서 수급되지 않는 사태에 처했다면 어떻게 된 일일까. 국정감사에서 이주영 의원이 지적했듯, 수급 차질이 1년 전부터 공지되었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과연 누가 이 상황을 초래했는지 물어야 한다. 이 주사제(2㎎)는 782원 수준으로 껌 한 통보다도 싸다. 생산원가를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정부의 약가 고시 정책에 의해 이른바 ‘후려쳐진’ 가격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 제약사는 노후된 생산공정을 재편할 예산조차 없어 생산 중단 위기에 놓였음을 보고한 바 있다. 임상 현장에서 필수적이고 대체가 어려운 약이라 정부가 직접 퇴장방지의약품으로 관리하던 약이 생산 중단 위기라면 정부는 마땅히 대책을 마련했어야 옳다. 이런 약이야말로 사실상의 ‘공공재’이기 때문이다. 시장이 실패하더라도 정부가 작동해야 하는데 이번 사안은 오히려 정부가 시장 실패를 부추긴 셈이라는 점이 문제다.
그럼에도 보건복지부는 근본적인 대책을 내놓지 못한 채 변명에 머물러 있다. 이중 대체약이 있다는 주장 역시 현실을 모르는 인식에 가깝다. 복지부가 대체약으로 언급한 2차 약제는 반감기나 약효, 안전성 측면에서 기존 약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소방관에게 불을 끄는 데 물이 없으니 흙을 쓰라는 것과 다르지 않다. 현장 전문성 없는 관료들과 당사자성 없는 학자들의 탁상공론이 이런 행정편의적 답변으로 이어진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든다. 환자단체와 의협 역시 이 문제에 대해선 한목소리를 낼 필요가 있다.
의료가 돌봄의 연속선 위에 있다는 전제에서 보면, 아티반의 부재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이는 우리 사회가 가장 긴급하고 필수적인 자원을 어떻게 생산하고 배분하고 있는지를 되묻는 문제다. 뇌전증 환자를 나와 무관한 소수로 바라보는 시선과, 언젠가 나와 가족에게도 닥칠 수 있는 일로 인식하는 시선은 전혀 다른 결과를 낳는다. 요컨대 뇌전증 환자나 그 가족, 혹은 이를 경험한 이들에게 이 글은 의미가 없을지 모른다. 이 글의 목적은 아티반이 어떤 약인지조차 몰랐던 이들, 그리고 이 지면을 할애한 논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몰랐던 이들에게 사안의 본질을 분명히 전달하는 데 있다.
문제의식은 명확하다. 필수 의약품의 안정적 공급은 시혜가 아니라 국가의 존재 이유다. 그리고 국가를 그 방향으로 엄준하게 움직이게 하는 힘은 오직 이를 지켜보는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이것이 아티반이라는 생소한 약의 이름을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이유다.
이기병 한림대의대 내과교수 의료인류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