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3% “AI 도입으로 고용 불안 느낀다”
‘고용 유연화, 쉬운 해고로 이어질라’ 우려
IT·벤처·스타트업 기업들이 입주해 있는 판교 벤처타운. 경향신문 DB
코로나19 대유행 시기를 거치며 ‘부르는 게 값’이 된 개발자 시장이 급격히 얼어붙고 있다. 개발자는 프로젝트 단위로 일하는 프리랜서가 많아 비교적 이동이 자유로운 직군으로 여겨졌지만, 최근에는 분위기가 달라졌다. 생성형 인공지능(AI) 확산으로 고용 안정에 대한 불안이 커진 영향이다.
네이버 개발자 박민수씨(가명)는 5일 “AI로 코딩 생산성이 높아지면서 예전보다 적은 인원으로도 개발이 가능해졌다”며 “신규 채용이 줄어드는 흐름은 이미 체감되고 있다”고 말했다.
박씨는 “정보기술(IT) 기업 매출이 계속 성장하고 있지만, 사람을 더 뽑기보다는 기존 인력으로 버티려 할 것”이라며 “한국은 해고가 쉽지 않으니 채용을 줄이면서 필요한 인력 수요를 맞출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이어 “AI로 생산성이 2~3배 올라갔다면 추가 채용 없이 현재 인력으로 매출을 확대하려는 전략을 택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는 “동료들 사이에 해고가 쉬워지면 개발자들 다 잘릴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있다”며 “예전에는 더 좋은 조건을 찾아 움직이는 게 자연스러웠다면, 지금은 자리를 지키려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프리랜서 개발자 김지혁씨(가명)는 2년 전 회사를 나온 것을 후회하고 있다. 김씨는 “정규직을 그만두고 나왔을 때만 해도 언제든 다시 취업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최근에는 상황이 다르다”며“AI 도입 이후 개발자 수요 자체에 대한 불확실성이 커졌다”고 말했다.
그는 “요즘은 클로드(생성형 AI)를 쓰면 프론트엔드 개발자가 백엔드까지 어느 정도 커버할 수 있고, 기획자도 간단한 코딩은 직접 처리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며 “프리랜서로 일하다 언제든 취직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요즘은 쉽지 않다”고 했다. 프론트엔드는 사용자 인터페이스, 백엔드는 데이터 처리와 시스템 로직을 담당하는 영역이다.
더불어민주당 게임특별위원회와 민주노총 화섬식품노조 IT위원회가 지난달 15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AI 시대의 K-게임, 노동자에게 길을 묻다’ 간담회를 개최했다. 화섬식품노조 제공
개발 직군 비중이 높은 게임업계에서는 AI 확산에 따른 고용 불안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지난달 민주노총 화학섬유식품노조 IT위원회가 현업 종사자 1078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77.3%가 “AI 도입으로 고용 불안을 느낀다”고 답했다. 그러나 AI 도입과 관련해 회사와 노조 간 공식 논의가 진행 중인 곳은 26.7%에 불과했다.
일자리 감소는 통계로도 드러난다. 국가데이터처가 발표한 ‘2026년 2월 고용동향’에 따르면 IT·통신 업종으로 꼽히는 ‘전문, 과학 및 기술 서비스업’과 ‘정보통신업’ 취업자는 작년 동월 대비 각각 10만5000명, 4만2000명 감소했다.
채용 공고 기준으로도 감소세가 확인된다. 채용 플랫폼 캐치에 따르면 ‘상반기 공채 시즌’인 지난 3월 IT·통신 산업의 대기업·중견기업의 신입 채용 공고 수는 전년 동월 대비 73% 급감했다. 업계에서는 AI가 초급 개발자 업무를 일부 대체해 신입 채용 축소로 이어졌다고 보고 있다.
고용 불안이 커지면서 취업 시장에서도 안정성을 중시하는 경향이 강화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오민규 노동문제연구소 해방 연구실장은 “과거 개발자를 비롯한 IT 업계 종사자들은 ‘여기 말고도 나 찾는 기업 많다’는 인식으로 이직을 선택 가능한 하나의 대안처럼 여겨왔다”며 “하지만 신입 채용이 얼어붙으면서 자신감이 줄어들고 있다”고 짚었다.
이재명 대통령이 19일 청와대 본관에서 열린 경제사회노동위원회 1기 출범 기념 ‘대통령과 함께하는 노동정책 토론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김창길 기자
이런 가운데 정부는 고용 유연성을 높이는 방향의 제도 개편을 검토하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3월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출범 기념 노동정책 토론회에서 “노동계가 고용 유연성을 일부 양보하는 대신 사회안전망을 강화하고, 그 비용을 기업이 부담하는 구조가 필요하다”고 밝힌 바 있다.
고용 유연성은 채용·해고뿐 아니라 근로시간, 직무 배치 등을 탄력적으로 운영하는 개념을 포괄한다. 다만 한국에서는 해고 요건이 엄격한 만큼 실제로는 해고 규제를 완화하는 방향이 될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노동계는 고용 불안이 커지는 상황에서 해고 요건 완화 논의가 병행되는 데 반발한다. 한국노총은 “한국 노동시장은 이미 정리해고와 구조조정이 빈번해 경직돼 있지 않다”며 “유연화는 노동자의 자기 결정권을 약화시킬 수 있다”고 밝혔다. 반면 경영계는 경직된 고용 구조가 신규 채용 위축으로 이어지고 있다며 유연성 확대를 요구하고 있다.
고용노동부 관계자는 “AI 확산으로 노동시간 단축이나 근무 방식 변화 등 다양한 논의가 가능해졌다”며 “다만 현재로서는 고용 유연화와 관련한 제도 개편이 본격화된 단계는 아니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