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일(현지시간) 이란 국적 여객선 아틀라스 피쉬로호가 호르무즈 해협에 정박한 선박 근처를 항해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이란 호르무즈 해협 내 한국 선박 사고와 이란의 아랍에미리트(UAE) 정유 시설 공격으로 중동의 군사적 긴장이 다시 고조되면서 글로벌 금융시장이 요동치고 있다. 휴전으로 100달러 아래로 떨어졌던 국제유가는 어느새 100달러를 다시 넘어섰으며, 미국 국채금리도 급등했다. 전쟁 불확실성이 계속되면서 물가를 끌어올리고 생산·투자·소비심리를 동시에 위축시킬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미국의 프로젝트 프리덤(해방 작전)이 개시되고 한국 해운사 HMM이 운용하는 화물선 ‘나무호’에 화재가 발생하는 등 호르무즈 해협에서의 갈등이 격해진 4일(현지시간) 국제유가는 급등했고 금융시장은 약세를 보였다.
이날 런던 ICE선물거래소에서 브렌트유 선물은 전장보다 5.8% 오른 배럴당 114.44달러에 거래를 마쳤다. 종가 기준으론 연중 세 번째로 높은 수준이다. 서부텍사스산원유(WTI)도 4.39% 오른 106.42달러로 마감하며 105달러를 웃돌았다.
지난달 초 미국과 이란이 휴전한 뒤로 4월 17일 브렌트유는 90.38달러까지, WTI는 83.85달러까지 내려갔으나, 미국이 이란 해상 봉쇄를 발표한 29일부터 무력 대응 분위기가 고조되자 유가가 급등하는 양상이다.
물가 불안과 금리인상 우려가 확산하면서 미 국채 30년물 금리는 5%를 넘어 지난해 7월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을 기록했다. 국채금리 상승은 채권가격 하락을 의미한다. 이 영향으로 미 3대 주가지수는 일제히 하락 마감했고, 금 가격은 약세, 달러 가치는 강세를 보였다.
중동산 원유 의존도가 70.7%에 달하는 한국 경제도 쉽사리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
유가가 오르면 물류비용이 오르고, 전쟁에 따라 원자재 공급망도 마비되는 등 ‘삼중 악재’가 겹치며 물가 상승 압력이 커진다. 수입 원자재 의존도가 높은 제품을 중심으로 가격 상승이 확산하는 양상이다.
국내 휘발유 가격은 여전히 2000원을 넘어선 상태다. 5일 한국석유공사 유가정보사이트 오피넷을 보면 서울 평균 휘발유 가격은 리터당 2051.74원을 기록했다. 도매가격을 반영하는 생산자물가지수는 3월 125.24로 전월보다 1.6% 올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4년 만에 가장 높은 상승률을 기록했다. 국제통화기금(IMF)도 올해 한국 물가상승률 전망치를 기존 1.8%에서 2.5%로 상향 조정했다.
소비심리가 위축될 우려도 제기된다. 한국은행 소비자심리지수는 1·2월 연속 상승하다가 호르무즈 해협 봉쇄가 현실화된 3월 107.0으로 전월 대비 5.1포인트 하락했다. 기업 경기 전망을 보여주는 기업심리전망지수 역시 93.1로 4.5포인트 하락했다. 재정경제부는 소비자심리지수 하락이 소매판매(재화 판매 지표)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으로 내다봤다.
호르무즈 해협을 둘러싼 군사적 긴장이 두 달 넘게 이어지면서 스태그플레이션 우려도 조심스럽게 거론된다. 생산 단계에서 시작된 물가 상승이 소비자 가격으로 확산되는 가운데, 생산·투자·고용 전반의 둔화가 이어지는 ‘도미노 효과’가 나타날 수 있다는 분석이다.
이은재 국제금융센터 부전문위원은 전날 정기보고서에서 “전 세계적으로 스태그플레이션 압력이 높아지고 있으며, 전쟁 영향을 과소평가해온 채권시장을 포함한 글로벌 자산시장의 가격 조정 가능성도 확대됐다”며 “에너지 가격 급등으로 신흥국 중심으로 실물경제 타격이 본격화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재경부도 4월 경제동향에서 “중동 지역 긴장 고조에 따른 경기 하방 위험과 국제유가 상승에 따른 물가 변동성 확대, 소비·기업 심리 둔화 등 민생 부담 증가 우려가 있다”고 진단했다.
양준석 가톨릭대 경제학 교수는 “소비를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해소돼야 하지만 전쟁 상황에서는 이를 기대하기 어렵다”며 “정부는 원자재와 석유 공급을 최대한 안정적으로 확보해 불확실성을 줄이는 데 주력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