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후 가장 하고 싶은 일이 여행이었던 한 지인은 오랜 고민 끝에 캠핑카를 한 대 샀다. 평생 직장에 매여 살았으니 이제는 시간에 쫓기지 않고 마음껏 길 위를 달리며 살아보고 싶다고 했다. 캠핑카 안은 작지만 완벽했다. 아늑한 침대와 주방, 냉장고, 화장실까지 갖춰져 있었다. 실제로 처음 몇번은 아내와 바다를 보고 산을 오르고 창밖 풍경이 바뀌는 시간을 보내며 꿈을 실현하는 듯했다.
하지만 몇달이 지나자 막상 떠나는 일이 쉽지 않았다. 일정은 여전히 존재했고, 체력은 예전 같지 않았으며, 함께할 사람의 시간도 맞추기 어려웠다. 그렇게 캠핑카는 점점 움직이지 않는 시간이 길어졌고, 이제는 전용 주차장 한편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존재가 되었다. 결국 한때의 설렘은 애물단지로 변해버렸다.
우리 주변에는 이 주차된 캠핑카와 닮은 노년의 모습이 많다. 흔히 나이가 들어 현역에서 물러나면 그저 여유롭고 자유로운 인생의 황금기가 펼쳐질 것이라 기대하지만, 현실의 노년은 때로 그 기대와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우리를 기다린다. 사회적 역할이 하나둘 줄어들고, 관계의 폭이 좁아지며, 도움을 받는 일이 많아질수록 문득 스스로를 쓸모없는 존재처럼 느끼는 순간이 찾아온다. 그토록 갈망했던 자유로운 시간이 어느 순간 애물단지처럼 느껴지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왜 이런 일이 생길까. 어쩌면 우리는 시작할 때 기대를 너무 크게 품었는지 모른다. 은퇴는 단순히 시간이 많아지는 사건이 아니다. 수입 구조가 바뀌고, 체력과 건강의 조건이 달라지며, 오랫동안 유지해온 관계와 일상의 리듬이 흔들린다. ‘시간만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와 현실의 삶 사이에는 작지 않은 간극이 존재한다. 세상은 빠르게 변해가는데 그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새롭게 찾지 못하면 어느 순간 뒤로 밀려나는 느낌을 받게 된다. 애물단지처럼 느껴진다는 것은 실제로 가치가 사라졌기 때문이 아니라 그 가치가 드러날 기회를 아직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스스로를 보물단지로 여기며 살아갈 수 있을까. 중요한 것은 아주 사소한 것에서부터 다시 쓰임을 찾는 일이다. 우리가 평생 쌓아온 풍부한 경험과 지혜, 그리고 삶에서 길어 올린 감각은 사라지지 않는다. 예전과 같은 역할이 아니어도 괜찮다. 자리와 방식이 달라질 뿐 존재의 무게와 가치는 사라지지 않는다. 작은 쓰임이라도 다시 발견할 때 일상도 제자리를 찾아간다.
본질은 스스로를 대하는 태도에 있다. 우리는 종종 타인의 시선으로 자신을 재단하지만, 정작 오래 남는 것은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방식이다. 사소한 하루를 허투루 보내지 않고 작은 역할에도 나만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 아직 내 안에 머물고 있는 가능성을 들여다보는 정성이 필요하다. 스스로를 보물단지처럼 귀하게 여기는 마음은 그렇게 시작된다. 거창한 성취가 아니어도 좋다. 나를 쉽게 포기하지 않겠다는 다짐 하나면 충분하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자기 효능감’과 ‘자기 수용’으로 설명한다. 무언가를 해낼 수 있다는 믿음과 지금의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마음이다. 이 두 마음은 서로를 밀어 올린다. 나를 품어줄 때 한 걸음 내디딜 힘이 생기고, 그 한 걸음이 다시 나를 믿게 한다.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따라 같은 시간 속에서도 전혀 다른 생을 만들어낸다.
다시 지인의 캠핑카를 떠올려본다. 한때는 로망이었고, 어느 순간 애물단지가 되어버린 차. 그것이 처음부터 잘못된 선택은 아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지 않을까. 노년은 무너져가는 시기가 아니라 다시 쓰임을 찾아가는 성숙의 시기이다. 애물단지와 보물단지의 차이는 물건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고 사용하는 우리의 마음에 달려 있다.
이제 마음속 주차장에 세워둔 캠핑카를 다시 천천히 움직여보면 어떨까.
김기연 중앙대 심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