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교수님의 말이 종종 귓가를 울린다. “본인의 경쟁자는 옆에 앉은 동료도, 옆 연구실의 친구도 아니에요. 태평양 건너에서 맨날 밤새우는 연구자들이에요.” 이 한마디 덕에, 한국에 사는 연구자의 아이덴티티로 최대한 다른 시선에서 제시할 수 있는 연구들을 국제학회에서 선보이려고 애를 썼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한국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전 세계 어디서나 통용될 수 있는 거라고 설득하는 것에도 퍽 애를 먹었다. 본인들이 속한 나라에선 별다르게 코멘트도 하지 않으면서, 꼭 한국인을 대상으로 연구하면 일반화를 운운하는 것에 분통을 터뜨리기도 했다.
왜 우리는 글로벌 저널이나 국제학회를 계속 바라봤는가. 그렇게 펼쳐지는 우리의 논리와 지혜가 지구별 어딘가에 뿌리를 내리고 영향을 끼치며 살아가리라는 믿음 때문이다. 본 적 없는 누군가에게 읽혀 인용되고, 그것이 새로운 지식을 낳아 증식하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다. 이 ‘한국적 사고’라는 것이 경쟁력이 있다고, 우리니까 이런 사고를 할 수 있는 거라고 내세우고 싶은 꼿꼿함도 한몫했을 것이다.
스타트업에 투자할 때도 창업자분들께 꿈의 크기를 종종 묻곤 했다. 정말로 해결하고 싶은 문제의 크기를 알고 싶어서였다. 그렇게 발화되는 표현들은 실제로 해당 스타트업이 점유하고자 하는 시장의 크기이기도 하고, 타깃 사용자들이 경험하는 문제의 깊이이기도 하다. 그걸로 우리는 이 사업에 투자했을 때의 임팩트를 측정하고 성장률을 예측한다. 그들이 푸는 문제가 보편적인 일이고, 한 번 문제를 풀 때마다 드는 비용 대비 사용자 수가 많을수록 좋다면, 시장이 큰 곳에서 첫날부터 창업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요즘은 큰 꿈을 품은 꽤 많은 한국인 창업자들이 실리콘밸리로 건너가 스타트업을 설립한다.
꿈의 크기가 크면 한국 땅에서는 답이 없는가? 그렇지 않다고 믿는다. 특히 일부 분야는 한국에 충분한 밸류체인이 마련돼 있고, 이 안에서 테스트베드를 가동해 글로벌 경쟁력을 마련해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이러한 빌드업에 너무 많은 시간이 걸리는 것은 문제다. 투자 밸류가 상대적으로 낮게 책정되는 것도, 초기 투자의 티켓사이즈가 작은 것도 아쉬운 대목이다. 강력한 자본 투입이 초기 경쟁력을 강화하는 주요한 지표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여전히 스케일업 문법이 정교하게 전수되지 못하는 것도 한계가 분명하다. 몸집을 불려가는 과정에서의 어려움을 개인기로 해소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그것이 퍽 불안하다.
모든 게 다 어찌어찌 해결된다 하더라도, 처음으로 돌아가 우리는 과연 꿈의 크기를 키울 수 있는 환경에서 살고 있는가를 되짚고 싶다. 개인기가 아닌, 시스템적으로 우리의 독특한 시선과 관점을 글로벌 무대에서의 차별화 포인트로 만들 수 있는 파이프라인이 마련돼 있는지 궁금하다. K라는 접두어로 포개진 ‘우리의 경쟁력’이라는 것들에, 우리의 혁신가들이 자라나고 걸어나갈 공간은 충분히 마련돼 있나. 한국적 시선과 관점은 분명히 경쟁력이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사교육과 과보호, 규율과 조심성으로 꾹꾹 눌러진 이 세상이 유지되는 이상, 혁신가는 여전히 고난과 역경을 딛고 스스로 일어선 영웅의 서사에서나 등장할 것이다.
유재연 국가AI전략위원회 사회분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