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조직이든 작은 조직이든 담당자들이 하는 실수가 있다. 조직의 명운이 걸린 일을 본인이 처리하지도 못하면서 시간만 허비하는 것이다. 조직이 알았을 때는 이미 손쓸 수 없는 상황이 된 경우가 많다. 일찍 보고라도 했으면 차선책이라도 강구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첫째는 담당자의 능력이 부족해서 혼자 고민만 하는 경우다. 여기서 능력이란 개인의 자질보다 제도적 제약 요인을 말한다. 둘째는 조직이 ‘독점 기업(기관)’인 경우다. 이 경우 수십년에 걸쳐 형성된 밸류체인상의 이해관계자들이 독점 기업의 눈치를 보느라 문제를 알고도 침묵하기 때문이다.
지금 이런 일이 이 나라 전력산업에서 일어나고 있다. 온 나라가 탄소중립을 외치고 인공지능(AI) 3대 강국을 기필코 달성해야 한다고 외치고 있는데, 재생에너지의 경우 호남지역은 지금도 2031년 이후 계통 접속이 가능한 실정이다. 2030년 목표 재생에너지 발전용량은 100GW인데 현재 발전용량은 37GW뿐이다. 앞으로 연평균 12GW를 설치해야 하는데 이는 지금까지 연평균 설치량의 4배에 해당하는 규모다.
이러한 목표 달성을 위해 주민 참여형 햇빛·바람·계통 소득이 논의되고 있다. 햇빛과 바람 소득에 무려 820만명, 계통 소득에 180만명 등 총 1000만명에게 에너지 소득을 제공한다는 계획이다.
이들의 소득을 실현하려면 생산된 재생에너지가 전국에 유통되고 소비되어야 하는데, 문제는 여기에 있다. 재생에너지의 설비용량은 늘어도 유통이 제대로 안 돼 출력제한이 수시로 일어나고 있다. 송전망이 부족하고 일시적으로 남는 전기를 담아둘 저장용량도 턱없이 부족하다. 이 모든 과정에 대해 법적으로 독점 허가를 받은 한전이 혼자 수행하기 때문이다.
전력망, 한전이 감당할 능력 벗어나
급기야 정부는 ‘국가기간 전력망 확충 특별법’(전력망 특별법)을 만들어 2025년 9월 시행에 들어갔고, 이재명 대통령이 ‘국민성장펀드’ 활용을 제안했지만 아직까지 논의만 무성할 뿐이다.
이런 와중에 전력망 특별법 개정안이 최근 국회 법안소위를 통과했다. 주 내용은 국가기간 전력망확충심의위원회의 심의·의결을 거쳐 기후에너지환경부 장관이 지정한 경우 송전사업자(한전) 외의 사업자도 전력망 개발사업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결국 조건부로 송전망 ‘건설’에 민간 참여를 허용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민간 참여가 민영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관련 회의록을 보면 정부 관계자, 한전, 국회의원 모두 이 점에 대해 매우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민간이 건설하면 한전이 인수해서 운영하는 방식이 주로 거론된다. 그런데 지금도 시공은 100% 민간이 하고 있다. 이 두 방식은 어떤 차이가 있고, 여기에 수익률을 보장해주는 ‘국민성장펀드’가 개입되면 또 어떤 차이가 있는가?
이번 기회에 ‘송전사업 민자(民資) 참여’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난상토론을 해보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다. 결론이 현 정부의 방침과 같게 나오더라도 이런 토론 과정 자체가 이해관계자들에게 많은 시사점을 주게 되므로 사업의 효과는 높이고 부작용은 줄일 것이다.
‘민자’ 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게 민자고속도로다. 우리나라 고속도로는 43개 노선 5916㎞인데 이 중 민자고속도로는 23개 노선 977㎞로 약 17%를 차지하고 있다.
최초의 민자고속도로는 2000년 11월 완공된 인천국제공항 고속도로다. 정부가 민자고속도로를 허용한 이유는 우선 사회간접자본(SOC) 예산이 부족했고, 민자를 도입할 경우 공기 단축과 민관 경쟁으로 인한 서비스 향상이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재정고속도로와 민자고속도로가 서로 연결돼 국민들은 두 도로를 수시로 편하게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민자고속도로는 재정고속도로에 비해 비싸다는 인식이 강하다. 그러나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재정고속도로에 비해 인천공항 노선은 2.28배 수준으로 비싼 게 사실이다. 그러나 용인~서울 노선은 0.86배, 안양~성남 노선은 0.95배로 오히려 싸고 중간값은 1.1배 수준이다. 물류 원활화로 인한 사회경제적 편익은 포함되지 않은 단순 가격비교이다.
판매·그리드 사업자 분리 등 논의를
같은 망(網) 산업인데 그동안 전력은 왜 민자 논의가 나오지 않았을까. 크게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그동안 한전이 송전을 포함한 계통 안정화 업무를 잘 수행해왔기에 소비자들이 불편을 느끼지 못했다. 둘째는 우리 사회의 기간산업 민영화에 대한 알레르기적 반발로 정치권이 쉽사리 화두를 던지지 못하는 분위기 탓이다. 셋째는 전력망이 가진 폐쇄성이다. 도로는 고속도로가 싫으면 일반도로를 우회하면 되지만 전력망은 ‘선택 불가능한 필수망’이다.
이러한 이유로 전력망은 공기업인 한전이 컨트롤해야 한다는 믿음이 있어왔지만 이게 꼭 맞는 것은 아니다.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시대가 바뀌었다. 과거의 전기는 생산된 전기를 한 방향으로 보내고 소비자는 그에 맞추어 사용하면 됐다. 그러나 재생에너지의 간헐성으로 인해 소비자가 실시간으로 송·수전을 해야 하는 양방향 그리드가 필요해졌다. 즉 그리드의 다양성과 변동성이 올라가 한전이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벗어난다.
둘째는 재생에너지 비율을 크게 높이고 AI 3대 강국으로 도약하려면 민간 투자를 통해 적시에 전력망을 개통하고, 이를 통해 관련된 신산업 육성이 가능해져야 한다는 점이다.
셋째는 전력 관리·규제·감독 수준이 높아져 ‘민영화=폭리’ 공식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대부분의 국가가 그리드 소유와 운영의 국·민영 여부를 떠나 ‘판매사업자와 그리드 사업자를 엄격히 분리’하는 것도 이러한 흐름의 일환이다.
이해관계자들이 선입견을 버리고, 새로운 전력산업의 미래에 대해 우리 사회가 어떤 선택지를 받아들일 수 있을지를 보다 진지하게 논의해야 할 시점이다.
김경식 ESG네트워크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