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선가 잘못된 레코드가 돌아가고 있다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 분명 바늘을 새로 바꾸고 턴테이블의 수평을 맞췄는데도, 음악은 결정적인 순간에 튀어버린다. 그리고 일상의 리듬이 갑자기 견딜 수 없는 소음이 되어 내 심장을 조금씩 조이는 것 같다. 그 소음을 멈추기 위해 약을 먹거나, 누군가 내 이야기를 끝없이 들어주길 바라며 소파에 눕는다. 하지만 그 원인을 찾아 치료하지 못한다면, 병은 낫지 않고 약은 계속 먹어야 한다.
한국의 마음 치료라는 시스템은 어딘가 기묘한 구석이 있다. 정신과 대기실에는 사람들이 가득하지만, 의사와 마주 앉는 시간은 에스프레소 한 잔을 마시는 시간보다 짧다. 반대로 상담소의 문을 두드리면 공감과 경청이라는 이름의 긴 터널이 시작된다. 물론 다정한 위로는 소중하지만, 몇년째 터널 속을 걷다 보면 내가 길을 찾고 있는 것인지, 그저 어둠에 익숙해지고 있는 것인지 모호해진다.
공황장애도 대물림이나 유전적인 문제가 있을까? 아니면 같은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일까? 회사 잘 다니고 있었고 얼마 전에는 결혼도 한 나의 조카가 공황장애 때문에 회사를 그만두고 한참을 헤매다가 마음 치료를 하러 병원에 갔을 때 난 마음이 매우 착잡했다.
내 경우 자가운전이든 대중교통이든 출퇴근이 지옥일 정도로 극도의 터널증후군과 폐쇄 공포증을 앓고 있었기 때문에, 의사는 약 처방을 했지만 난 약 대신 퇴사를 선택했고 내 스스로에게 시골에서의 삶과 예술 처방을 선물했다. 그 영향 때문이었을까? 조카에게도 나의 예술 처방이 전이된 것인지 이런 말을 했다.
“정말 신기했어요. 진료 대기실에 앉아 있다가 벽에 걸린 그림을 보는데 갑자기 눈물이 나는 거예요. 대단히 독창적이거나 예술적인 그림은 아니었어요. 남자와 여자가 어딘가 멀리 산이 있는 벌판을 걷는 뒷모습을 그린 그림이었는데, 둘 다 덩치가 좋은데 여자는 어딘가 아픈지 혹은 불편한지 남자 쪽으로 살짝 기울어진 채 걷고 있고 남자는 그 어깨를 감싸안고 걷는 그림이었어요.”
난 흥미로워서 조카가 말한 그 그림을 당장 찾아봤다. 역시 대단한 그림은 아니었지만 왜 눈물이 났는지는 알 것 같았다.
“한창 힘들 때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의 응원조차 저버리기도 하는데, 그렇다고 호전되지도 않는 간극 때문에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게 되고 결국에는 내가 사라져야 힘든 상황이 끝날 거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는데요. 그 그림을 보고 절대적으로 나를 지지해주는 사람이 있고 그가 바로 내 옆에 있다는 걸 갑자기 깨닫게 된 것 같아요.”
바로 그 조카에게 보여주고 싶은 5월의 전시를 발견했다. 하인선 작가의 ‘심심’전이다.
뭐랄까? ‘야망 없는 그림’의 정수를 보여준다고 할까? 사람들은 보통 대단한 성취나 야망이 담긴 것을 보며 힘을 내라고 하지만, 사실 우리 뇌를 진짜 치유하는 건 이런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무심한 풍경일 때가 많다는 생각도 든다. 게다가 그림 속 두 사람의 엉거주춤 산행을 봐야 한다. 밤길인지 서로에게 의지하며 엉거주춤 만화처럼 걸으면서도 어디론가 가야 한다는 급박함도, 완벽하게 잘 그려져야 한다는 강박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냥 그렇게 살아도 된다고 말해주는 그림이다.
말해주고 싶다. 마음의 병을 앓는 모두에게. 너무 빨리 나으려고 애쓰지도 말자. 그냥 슬렁슬렁 가도 된다. 아무것도 아닌 채로. 조금 심심하게, 조금 느리게, 서로의 온기에 기대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