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전주영화제에서 특별전을 했던 우가나 겐이치의 신작 영화 <저주> 포스터.
3년 만에 다시 찾은 전주국제영화제. 영화 몇편을 봤고, ‘관객과의 대화’를 진행했다. 1990년대 일본에서 극장 개봉 없이 비디오로만 출시하며 한 시대를 풍미했던 V시네마 회고전 대담은 감회가 각별했다. 2002년 ‘씨네21’ 기자 시절, 미이케 다카시 감독과 아이카와 쇼 배우 등을 만나 현지 취재를 하고 ‘V시네마’ 특집 기사를 썼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그 시절 V시네마가 뿜어내던 날것의 에너지를 20여년이 지나 전주에서 다시 마주했다.
이번 영화제에서 흥미로운 만남은 일본의 우가나 겐이치 감독이었다. 매년 3~4편의 저예산 장르영화를 찍어내는 경이로운 생산성의 소유자다. 특별전에서 상영한 <저주> <브루클린의 Z급 감독을 좋아하게 됐어> <불완전한 의자> <세상의 끝으로부터>는 모두 6개월 동안 연출한 최신작이다. 호러부터 로맨틱 코미디까지 장르를 넘나드는 우가나의 작업 방식은 개인의 성실함을 넘어, 영화를 대하는 기본적인 태도가 다름을 보여준다. 그가 던지는 말에는 영화 만들기의 순수한 즐거움과 ‘나만이 할 수 있는 영화’에 대한 확신, 도발적인 독창성이 가득했다.
우가나 겐이치와 대화를 마치고, 한 가지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한국에서도 이런 영화가 나올 수 있을까. 가능하냐는 물음이 아니라, 왜 아직 없냐는 물음.
한국 문화계는 ‘오락’에 인색하다. 의미나 지식, 명확한 정보가 담기지 않은 순수한 유희는 가치 없는 것으로 치부되곤 한다. 후진국에서 선진국 문턱까지 숨 가쁘게 달려온 압축성장의 역사에서, 우리는 효율과 결과를 최우선 가치로 삼았다. 현실의 생존이 급급한 상황에서 상상과 도피는 무용하고 유치한 짓으로 여겨졌다. 세계적인 팬덤을 거느린 <스타 워즈>와 <스타 트렉> 시리즈가 한국에서만 힘을 쓰지 못하는 현상은 우연이 아니다. 우리에게 ‘장르’는 즐기는 대상 이전에,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게 만드는 ‘허구’에 가까웠던 것이다.
또한 한국은 ‘웰메이드’에 대한 집착이 강하다. 2000년대 초반까지 촬영, 녹음, 편집 등의 기본기가 부족했던 과거 탓일 수도 있다. 독립영화에도 상업영화 수준의 매끈한 퀄리티를 요구하고, 조악한 장면을 마주하면 ‘함량 미달’이라며 냉소한다. 한국에서 저예산으로 장르영화를 시도하는 것은 그야말로 거대한 모험이다.
우가나 겐이치는 한국에서 거의 불가능해 보이는, 정반대의 길을 간다. 그는 스스로 ‘Z급 무비’의 길을 택했다. 어설픈 특수분장과 조잡한 CG는 메이저 영화와 비교하면 무척이나 초라하다. 그러나 우가나가 선택한 싸구려 영화에는 기발하고 독창적인 아이디어가 펄떡인다. <브루클린의 Z급 감독을 좋아하게 됐어>가 보여주듯, 우가나는 객관적인 결핍을 무한한 애정으로 승화시킨다. 우가나의 독특한 영화 세계에 국경을 넘어 장르영화 팬들이 열광하고, 해외 영화제와 세일즈 시장이 적극적으로 응답한다.
우가나 겐이치의 제작 방식은 흥미로운 타산지석이다. 그에게 영화는 완벽하게 세공된 예술품이기 이전에, 끊임없이 움직이며 쏟아내는 살아 있는 에너지다. 완벽을 추구하며 갈고닦는 대신, 지금 당장 열망하는 것을 빠르게 찍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우연과 활력을 영화에 담는다. 거창한 의미를 묻기보다 내가 즐거운 장면을 만드는 것이 최우선이다. 그러면서 장르를 자신의 방식으로 변주한다.
이제 우리에게도 그런 태도가 필요하다. ‘완성’을 ‘완벽’보다 앞에 놓는 것. 찍다 보면 생기는 우연과 실수를 결핍이 아니라 질감으로 받아들이는 것. 그런 태도를 공유할 때, 뜻 맞는 이들이 품앗이하듯 모여 빠르게 작품을 쏟아내는 공동체적 제작 모델도 실현 가능해진다. 그러고 나면, 발칙한 장르영화만을 위한 펀드나 소규모 배급 채널 같은 인프라도 가능해지지 않을까. 한국의 저예산 영화판이 리얼리즘의 무게를 조금 덜어내고, 자유로운 유희와 공상이 난무하는 장르의 놀이터가 되어주면 좋겠다.
결국 중요한 것은 영화를 끝까지 완성하는 일이다. 한 편의 위대한 걸작도 좋지만, 각자가 꿈꾸는 상상을 제한 없이 풀어내는 작은 영화들이 수없이 쏟아져 나오는 영화 생태계가 더 건강하다. 시끌벅적하고 들쭉날쭉하면서, 다음 세대의 목소리도 불쑥 튀어나오는 영화판. 그것이 한국 영화가 아직 가보지 못한, 진짜 미래일 것이다.
김봉석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