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석은 자들은 처방서를 3년 읽고서 대뜸 천하에 고치지 못할 병이 없다고 떠벌리지만, 막상 3년 동안 직접 병을 치료해 보고 나면 천하에 마음 놓고 그대로 쓰면 되는 처방이 없음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의학을 배우는 자는 반드시 의학의 근원을 넓고 깊게 파고들어 쉼 없이 정밀하고 근면하게 노력해야 한다. 도청도설(道聽塗說)을 가지고 의학의 도를 다 깨우친 양 말해서는 안 되니, 이는 자신을 깊이 망치는 짓이다.”
여러 의서(醫書)에 실려 전하는 위진남북조시대 학자 장담(張湛)의 말이다. 병의 원인은 같은데 증상이 다른 경우도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으며 여러 원인이 복합적으로 얽힌 경우도 허다하다. 그 모든 경우의 수를 고려하여 매우 섬세하고 신중하게 대처해야 하는 것이 의술인데, 도청도설, 즉 여기저기서 주워듣기만 했을 뿐 아직 스스로 깊은 이해에 이르지 못한 얕은 지식을 믿고 성급하게 말하고 적용하다가는 큰 낭패를 볼 수 있다는 경계다.
예나 지금이나 이런 마음가짐이 의사에게만 요구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도청도설은 어느새 우리 삶의 구석구석에 매우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손가락 몇번만 움직이면 금세 수많은 지식을 검색할 수 있는 데다 그것을 유려한 말로 엮어서 그럴듯하게 보여주는 AI까지 가세하는 바람에, 어디까지가 진정한 나의 지식이고 나의 말인지조차 모호하다. 이미 신체의 일부가 되어 버리다시피 한 스마트폰으로 단 몇초 만에 바로 근사하게 만들어낼 수 있는 지식과 말이니, 이젠 그 역시 나의 것이라고 해도 안 될 이유가 없어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니 근원을 넓고 깊게 파고드는 힘겨운 노력 따위는 더 이상 사람이 직접 할 필요가 없는 유토피아가 온 것일까? 요리 과정을 생략한 채, 아니 그런 것을 굳이 의식할 필요도 없이 즉석에서 즐기는 컵라면처럼, 지식과 말 역시 나의 내면에 쌓아두고 숙성하여 체화하는 과정을 거칠 것 없이 그저 언제든 필요할 때마다 꺼내어 보여줄 수 있는 상품처럼 소비하면 그만인 것일까? 이른바 ‘범용 AI’가 상용화되어 그 꺼내어 보여주는 과정마저 생략되고 만다면, 그럴 때 나의 지식, 나의 말, 아니 ‘나’는 어디에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