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작품은 감상하는 이들에게 저마다 다른 얼굴을 내보이기도 한다. 호소다 마모루 감독의 애니메이션 <늑대아이> 또한 그러하다. 늑대인간과 인간 여성 사이의 애틋한 로맨스이면서 동시에 절로 미소 짓게 만드는 아기자기하고 보편적인 육아기이며, 소수자 정체성을 지닌 아이의 성장담으로도, 타자와 더불어 사는 데 대한 정치적 메시지로도 해석될 여지가 있다.
한편 내겐 신의 아이를 낳아 기른 어머니, 더 넓게는 종파를 넘어서 성직자나 수도자의 혈연에 관한 일종의 우화로 읽혔다. 연인이 늑대인간임을 받아들인 채 그와 사랑을 나누었고, 따라서 늑대아이인 자식 역시 이 세상에 속하지 않으리라 이해하려 하면서도 오롯이 받아들이기는 힘들었을 마음. 아이가 언제든 내적 부름에 따라 떠날 수 있음을 알지만 붙들어두고 싶은 염원. 애초 창작자가 의도했던 알레고리는 아닐 가능성이 크지만, 관객 한 명에겐 그런 이야기로도 가닿을 수 있었다.
후반부에 이르러서였다. 아들 아메는 야생늑대의 삶을 택해 ‘속’을 떠나고자 한다. 어머니 하나는 다시는 산에 가지 말라며 가로막는다. 늑대는 10살이면 다 큰 어른이겠지만 인간인 넌 아직 아이라고, 더 지켜주어야 한다고. 폭우로 인해 산과 마을의 경계가 흐려지던 날, 아이가 산으로 향하려 함을 직감한 어머니는 단호하고 엄한 눈빛으로 문지방에서 그를 불러세운다. 바로 다음 장면에서 어느덧 단단해진 아이의 시선을 마주한 그녀의 눈빛은 마구 흔들린다. 치켜 올라간 눈꼬리를 스르르 내리며 안으로 들어가자고 힘없이 애원한다.
순간, 오래 알고 지낸 수녀님이 들려주셨던 일화가 생각났다. 수녀님은 어릴 적부터 어머니와 데면데면했다고 한다. 종종 밀쳐내지는 느낌을 받았고, 아버지의 폭언과 폭력을 못 본 척하는 것이 원망스러웠단다. 수도자가 되어 날마다 타인을 위해 기도하면서도 막상 친부모를 상기하면 얼음처럼 차디찬 무엇이 가슴 안에 뭉쳐지곤 했다고. 그러다 한 장면이 기억 저편으로부터 불쑥 떠올랐단다. 수녀원에 입회하려고 집을 나설 때 아직 어리니 정 가야 하거들랑 나중에 가라던 어머니의 청을 “지금 가야 해요”라며 단호히 끊어낸 자신이, 그때 흔들리던 어머니의 눈빛이. 정을 많이 주지 않았던 아이이니 언젠가 품을 떠나리라 예상했을 것임에도 헤어짐을 지연하고 싶어 본능적으로 흔들리던 그 눈빛의 기억으로 인해, 종교인의 당위로서 ‘사랑하려 하는’ 차원을 넘어 조금이나마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하셨다.
날 보면 예전의 당신 내면을 거울로 보는 듯하다 하신 수녀님. 스물몇 살 무렵부터 견디기 힘들어 찾아갈 때면 등을 쓸어주던 분. 전화를 걸어 말 잇지 못하면 “매일 기도해줄게요. 내가 죽을 때까지. 그다음엔 천상으로 가서도 할게. 그럼 되겠죠?” 토닥여주시곤 했다.
몇해 전, 휴가를 얻은 수녀님은 내가 사는 데 오셔서 며칠 머무셨다. 신선한 해산물 파스타를 사드리고, 바닷길을 걷고, 카페에 들어가 갓 구운 스콘과 블루베리 타르트도 나눠 먹었다. 취직해서 돈 버는 딸이 엄마랑 여기저기 좋은 곳 다닐 때 이런 마음일까 짐작했다. 소임지로 복귀한 수녀님은 택배를 하나 보낸다고 하셨다. 상자를 열자 열무김치와 깻잎무침, 호두멸치볶음, 우엉조림 등이 차곡차곡 담겨 있었다. 흔히 말하는 ‘집에서 보내준 밑반찬’이란 이런 것이겠구나, 이번에도 짐작했다. 그러니 기억의 얼음벽을 깨고 들어가 ‘마구 흔들리던 눈빛’의 한순간을 찾아내지 못해도 괜찮았다. 이를 대체하고 남을 만큼을 다른 데서 받았으니까.
지난 금요일엔 종일 바빴다. 늦은 밤 포털 검색창의 카네이션을 보고서야 무슨 날인지 알았다.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기도문의 한 문장을 빌려 청했다. “세상에서는 그들이 더없는 기쁨과 위안을 얻고 천상에서는 찬란히 빛나게 하소서.”
이소영 제주대 사회교육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