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민주화운동 46주년이 며칠 앞으로 다가온 지금, 12·3 내란 사태의 책임을 묻는 재판이 속속 진행 중이다. 그런데 일련의 재판 과정에서 유독 뇌리에 박힌 장면이 있다. 4월27일 박성재 전 법무부 장관에 대한 서울중앙지법 결심공판에서 내란 특검 정재인 검사가 구형 논고문을 낭독하던 순간이다. 정 검사는 박 전 장관이 ‘법 기술’을 실행했다고 비판하며 “법의 이름으로 법을 파괴하는 법 기술자에게 경종을 울리기 위해 엄중한 법의 심판을 내려달라”고 징역 20년을 구형했다.
누군가는 이상민, 김용현 등과 달리 박성재의 행동이 소극적 동조에 그쳤다고 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단 2분 만에 끝난 국무회의에 합법적 외피를 씌우기 위해 참석자 명단과 서명을 받아야 한다는 아이디어를 제공했고, 최상목·조태열이 비상계엄에 반대 의견을 낼 때 “경제와 외교가 걱정되는 모양이죠”라며 비아냥거렸다. 과천 법무부 청사로 이동하는 차량에서 출국금지팀을 비상대기시키고, 도착 즉시 전국 교정시설의 수용 여력을 파악한 사람도 그였다. 그가 행했던 조치가 계엄법에 적시된 것도 아니었다. 1985년 사법시험에 합격한 그에게, 최고권력자가 계엄을 실행하면 자연스레 그에 따르는 것은 초임 검사 시절부터 뇌리와 뼛속에 깊이 각인된 하나의 ‘매뉴얼’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 자신은 ‘소극적 동조’라고 생각했을 그의 행위는, 역설적으로 거대한 국가폭력이 작동하는 관료적이며 신체적인 메커니즘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1980년 5월18일 전남대 정문 앞에서 무자비하게 곤봉을 휘둘렀던 군인들 역시, 그저 몸에 밴 ‘훈련 매뉴얼’에 충실했을 뿐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민을 적으로 취급했던 그 참혹한 매뉴얼도 오랜 기간에 걸쳐 축적된 것이었다. 1979년 부마항쟁 직후 합동참모본부는 시위대를 “초동 단계에서 신속히 완전 제압”하기 위해서는 “다시는 가담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못하게끔 타격해야 한다는 섬뜩한 제언을 남겼다. 그로부터 10년 전, 필자가 발굴한 군의 ‘야전교범 19-15 폭동진압’(1969)에서도, 군은 시위대에 대한 ‘밀접한 타격’과 ‘신속한 돌진’을 기계적인 교리로 강조했다.
그보다 거슬러 올라간 4월혁명 때는 어땠을까. 1960년 4월혁명 전 기간에 걸쳐 경찰은 마산과 서울을 비롯한 전국에서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발포를 퍼부었고, 186명이 목숨을 잃었다. 시민에 대한 경찰의 무차별 발포 역시 4·3항쟁과 여순사건, 한국전쟁기 축적된 ‘적대’의 경험이 빚어낸 산물이었다. 이후 박정희 정권이 발포 문제에 극도로 신중했던 이유 역시, 4월혁명 이후 관련자들이 처벌받았기 때문이다. 그 선을 끝내 넘은 것이 1980년의 신군부였다. 그것이 광주의 비극을 낳았고, 그 비극을 딛고 한국의 현대 민주주의가 세워졌다. 박성재가 ‘소극적’으로 실행한 매뉴얼이 결국 작동에 실패했던 것은, 그렇게 구축된 민주주의가 생각보다 견고한 정념을 구축했기 때문일 것이다. 박성재에게 구형된 징역 20년은 그러한 민주주의적 정념에 국가기구의 폭력적 관성을 완전히 압도할 수 있게 하는 힘을 부여한다.
지난 5월8일 개헌안 처리가 끝내 무산되었지만 5·18정신을 헌법 전문에 수록하자는 논의는 여전히 무대 위로 올라와 있다. 개헌안에 담겨야 할 더 많은 내용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필요한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다만 촘촘한 폭력의 매뉴얼을 끊어내는 사명을 내란죄 재판에만 떠넘기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법 기술자와 소극적 동조자, 관료적 매뉴얼을 충실히 실행하는 자는 어디서나 다시 등장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들의 행위가 헌법 전문에 의해 미리 무효화되어 있다면, 그보다 더 강한 방어막은 없을 것이다. 이제 폭력의 알고리즘을 끊어내자. 우리 사회에 그것에 대한 강력한 합의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지난 1년 반 동안 목격했다.
권혁은 서울대 국제학연구소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