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 중계를 보다 보면 종종 ‘2루수, 중견수, 우익수 달려듭니다. 누구도 잡지 못합니다. 행운의 안타~’라는 말이 나온다. 응원하는 팀의 공격이라면 속으로 ‘개꿀’소리가 절로 나온다. 제대로 맞지 않은 힘없는 타구가 하필 수비수가 없는 지역에 똑 떨어지는 경우다. 텍사스 안타(야구 초창기인 19세기 말 텍사스 리그의 팀이 이런 안타로 결승점을 뽑았고, 지역 신문이 텍사스 리그의 안타라고 부르면서 굳어졌다)라고도 하고, 바가지 안타라고도 한다(야구 용어 대부분이 미국→일본을 거친 묘한 번역어인데, 바가지 안타만큼은 직관적이고 한국어의 맛을 살린 용어다).
물론 반대도 많다. 기막히게 잘 맞은 강한 타구가 하필 수비수가 딱 서 있는 자리로 향하면 꼼짝없이 아웃이다. 더 재수가 없으면 병살 플레이로 이어져 주자까지 사라진다.
‘운’ 설명한 BABIP, 야구통계 변곡점
ML 강타자 페타주 홈런 0개도 ‘불운’
지금 성공이 오롯이 내 능력 덕 아냐
야구가 알려주는 최고 덕목은 ‘겸손’
미국 시카고에 살던 ‘야구 덕후’ 로버트 보로스 매크라켄은 1999년 야구 덕후들이 모인 게시판에 ‘수비 무관 투수 지표(DIPS)’라는 새로운 개념을 제시했다. 삼진과 홈런, 볼넷, 사구 등 수비의 영향을 받지 않는 지표로만 계산하면 투수의 능력을 더 잘 설명할 수 있다는 이론이다. 거꾸로 해석하면, 일단 방망이에 맞은 공은 투수의 능력으로는 어쩔 수 없다는 뜻이었다. 즉 ‘운’이 아주 크게 작동한다는 얘기다. 매크라켄의 DIPS는 ‘인플레이 타구 타율(BABIP)’이라는 개념으로 확장됐고, 야구 통계 역사를 바꾼 ‘변곡점’으로 평가받는다.
마찬가지로, 타자도 일단 방망이에 맞고 나간 공은 더 이상 어찌할 도리가 없다. 부디 수비수 정면으로 향하지 않길 바라는 수밖에 없다. 야구팬들은 그래서 ‘바빕(BABIP)신의 가호가 있기를’이라고 바란다.
이후 연구가 거듭되고 계산이 정교해지면서 인플레이 타구의 안타 확률이 100% 운은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났지만 여전히 ‘운’은 야구에서 중요한 요소다. 오타니 쇼헤이도 고교 시절 인생 목표와 실행 방안을 적은 ‘만다라트’의 8개 항목 중 하나를 ‘운’으로 정했고, 이를 위해 ‘인사 잘하기’ ‘쓰레기 줍기’ 등을 실천 방안으로 삼았다.
9회말 2사 만루에서 짜릿한 역전 결승 3타점 2루타가 나왔다면, 분명 타자가 강한 타구를 만들어냈기 때문이지만 공이 방망이에 맞는 순간 각도가 1도라도 좌우로 움직였다면 평범한 뜬공이 됐을 수도 있다.
메이저리그 강타자 페르난도 타티스 주니어(샌디에이고)는 30홈런이 거뜬한 타자인데, 올시즌 40경기를 치르는 동안 아직 홈런이 1개도 없다. 타구가 약한 것도 아니다. 강한 타구 비율에서 상위 2%에 든다. 평균 타구 속도 역시 상위 9%다. 강한 타구 비율이 하위 3%인 데다 타석 기회도 잘 주어지지 않는 김혜성(LA 다저스)도 벌써 홈런 1개를 신고했다.
타티스 주니어는 디애슬레틱 인터뷰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하고 있다. 그런데도 나아지지 않는다. 이유를 모르겠다”고 털어놓았다. 타티스 주니어는 “야구의 신들이 나에게 정말 화가 난 것 같다”고 말했다.
LG 박동원도 매년 20홈런이 거뜬한 타자지만 올시즌 개막전에서 홈런 1개를 때린 뒤 32경기에서 홈런이 나오지 않고 있다. 불안은 의심을 낳고 의심은 자칫 공포와 좌절로 이어질 수 있다. 야구는 그 불안이 어쩌면 ‘불운’이었을 가능성을 알려준다.
야구는 매일매일 하는 종목이고, ‘큰 수의 법칙’과 ‘평균 회귀’ 그리고 ‘바빕(BABIP)’을 통해 운과 불운이 오르내린다는 것을 매 시즌 증명하고 가르쳐주는 종목이다.
그러니, 언젠가 운이 온다. 페타주도, 박동원도 곧 홈런을 치게 된다(지금 주식이 없다고 두려움에 떨 필요 없다). 잘 맞은 타구는 잡히고, 빗맞은 타구가 끝내기 결승타가 된다.
그 반대도 명확하다. 지금의 성공이 오롯이 내 능력과 노력 때문은 아니다. 이 기회에 ‘최대한 땡기자’는 전략은 유효하거나 적절하지 않다. 야구의 득점은 뒤 타자가 나를 불러들여준 덕분이고, 내 타점은 내 앞에 주자들이 나가준 덕분이다. 투수의 승리는 수비수들이 잘 잡아주고, 타자들이 잘 쳐준 덕분이다. 여기에 야구는 ‘운’까지 더해져야 이길 수 있는 종목이다. 그러므로 야구가 가르쳐주는 최고의 덕목은 겸손이다. 야구를 좋아하면, 겸손은 힘들지 않다.
이용균 영상·콘텐츠랩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