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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백이 사라지는 시대

입력 2026.05.13 20:13

  • 조은 시인
  • 기사를 재생 중이에요

글에서는 행간이, 말에서는 여백이 사라지고 있다. 의사도 심리상담사도 주변의 성공한 사람들도 하나같이 말한다. 상대방에게 오해의 여지도 애매한 여운도 남기지 말고, 분명하고 정확하게 말하라고. 대체로 성공한 그들은 주저 않고 말한다. 분명하지 않은 당신의 말투가 오해를 낳았고, 당신이 문제를 만들었다고. 그 치명적인 결점을 고치는 순간부터 당신의 삶은 도약할 수 있다고.

이런 종류의 글이나 충고를 대할 때마다 생각나는 사람들이 있다. 한때 내 삶에 좋은 영향력을 행사하던 그들은 모두 사라져버렸다. 내 삶에서만 사라져버린 것이 아니다. 완전히 사라져 이젠 누구를 통해서도 생사를 확인할 수가 없는 이들도 있다. 그들을 그리워하는 마음, 너무도 아프다.

그중 한 친구의 부재가 유난히 가슴 아프다. 그가 유명한 심리상담사를 만나기 위해 한강을 건너다니기 전까지의 살아가던 모습을 나는 좋아했다. 그는 어느 자리에 있어도 빛이 났고, 헤어지면 그리웠다. 인간의 감정이란 전달될 수밖에 없는지 그는 자주 나를 만나러 오곤 했다. 특히 자신에게 힘든 일이 있을 때면 더 자주 왔고, 자고 가는 날도 있었다.

나만 그때의 그를 좋아했던 것이 아니다.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때의 그를 사랑했다. “후덕하다” “인자하다” “푸근하다” “사랑스럽다”는 말을 즐겨 듣던 그의 말투는 상담을 시작하면서부터 공격성을 띠기 시작했다.

언제부턴가 그 분야의 엄청난 지식을 습득해 이론으로 무장한 그에게 추종자들도 생겼다. 그쪽 분야의 독서량이 많은 나만 경보음을 들었던 것일까. 불려 다니는 곳이 많아 바쁜 그와는 거의 만날 수 없었지만, 어쩌다 마주치는 그는 예전의 그 사람이 아니었다. 이제는 그의 생사조차 알 수 없다는 사실만 남았다.

오늘 아침 그가 떠올랐고, 시몬 베유의 한 문장이 뒤따라 떠올랐다. “집중은 가장 귀하고 고결한 형태의 관대함이다.”

잊지 말자. 여백과 행간은 인간관계에도 집중하게 한다. 그것은 약간의 조율로 서로를 깊이 알 수 있는 심오한 공간이다. 행간이 없는 관계는 초가공식품처럼 우리를 병들게 할 수도 있다. 행간 속에는 낭만, 관대함, 온정, 자비심 같은 것들이 무한 내재해 있다.

다 말하지 않고 남겨두는 여백에는 귀를 귀울이게 하고, 존재에게로 가까이 다가가게 하는 어마어마한 힘이 존재한다. 생각해보라, 똑 부러지게 충고하는 자들을. 느리고 크게 변할 수 없는 본질과 심성을 지닌 당신을 과거에 그들이 어떻게 좌절시키고 멈칫대게 했는지를.

사실 이렇게 말하고 있지만 나는 똑똑한 사람들을 부러워한다. 어떤 상황에서 내겐 불가능한 방식으로 언어를 똑똑하게 구사하는 사람들에게 아픈 충고도 많이 듣는다.

얼마 전엔 몇년 동안 자주 보며 잘 지내던 젊은 사람에게 큰 충격을 받았다. 결국 행간의 문제였다. 나를 포함해 셋이 있는 자리에서 나이 든 사람과 젊은 그녀가 하는 대화는 똑 부러지는 젊은 그녀가 주도했고, 많이 생각한 뒤 말하는 연장자는 제대로 말할 기회도 갖지 못했다. 연장자가 힘들게 골라서 한 말은 똑 부러지게 말하는 젊은이에게 닿자마자 주격이 바뀐 채 되돌아가 상처를 주었다. 모든 것을 ‘노화’와 ‘당신의 태도’라고 지적하던 젊은 사람은 행간의 필요를 전혀 느끼지 않았고, 그들을 지켜보던 나는 평소 좋아하던 그녀에게 실망했지만 끼어들진 않았다. 그 침묵 또한 여백임을 젊은이는 알았을까.

여백이 없는 사람은 부풀지 않은 빵과 같다. ‘내가 굶주린 당신을 위해 이처럼 큰 빵을 준비해서 들고 있다’는 투의 말투는 위험하다. 딱딱하고 큰 빵은 몽둥이처럼 사용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또한 고마운 존재임을 잊지 말자. 이제는 누군가에게 대가 없이 충고해주는 이도 귀한 세상이 되었으니 말이다.

조은 시인

조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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