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의 은혜는 하늘 같아서 우러러볼수록 높아만 지네.” 나이 든 이들이 은사를 모시고 이 노래를 부를 때, 그 공간은 돌연 따뜻해진다. 추억이 안개처럼 피어오른다. 신산스러운 삶의 굴곡을 통과해온 이들이지만 이 시간만큼은 시름을 내려놓고 삶의 원형 같은 기억 속으로 달려간다. 이 광경을 볼 때마다 흐뭇한 미소가 지어지면서도 가슴 한쪽이 쓸쓸해진다. 우리 시대가 우러러볼 ‘어른의 뒷모습’을 잃어간다는 상실감 때문이다.
우리 인식은 정글처럼 뒤엉켜 모호하기 마련이다. 그럴 때 손에 든 마체테로 덤불을 툭툭 쳐서 길을 내어주던 분들이 있었다. 흔히 스승을 가르치는 사람이라 하지만, 진정한 스승은 가르치기보다 가리키는 사람이다. 그들은 말이 아니라 태도로 우리가 지향해야 할 삶의 방향을 보여준다. 다그치기보다는 기다려주고, 채우기보다는 깨우려 한다. 우리 마음속 씨앗 형태로 숨겨져 있는 가능성을 호명해 마침내 현실이 되게 한다.
알베르 카뮈는 1957년 노벨 문학상 수상 직후, 초등학교 시절 은사 루이 제르맹에게 편지를 보냈다. “이 모든 것은 선생님 덕분에 시작되었습니다.” 가난한 형편과 시대적 혼란 속에서 주눅 들어 지내던 아이에게서 제르맹은 감춰진 재능을 길어 올렸다. 그는 마중물이 되어 카뮈라는 거대한 샘을 터뜨렸다. 삶이 신비이자 선물임을 일깨우고 존재의 경이로움에 눈을 뜨게 하는 것, 타자와 평화롭게 공존하며 세상에 대한 경외를 가르치는 것, 그것이 스승의 진정한 직분이다.
중요한 지점은 스승 또한 멈추지 않고 배우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배움을 멈추는 순간, 사람은 진리의 증인이 되기보다 자기 확신의 관리자가 되기 쉽다. 생동감 있는 창조성과 자유를 잃고 관습의 무게에 짓눌릴 때 정신은 병들고 둔중해진다. 한자리에 머물지 않고 새로움을 향해 늘 길을 떠나는 구도자만이 스승의 이름을 감당할 수 있다. 그렇기에 스승은 제자보다 더 앞서가는 자가 아니라, 더 깊이 살아내는 자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랍비나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고 가르쳤다. 이는 단순히 호칭의 문제가 아니었다. 권위를 영광의 도구로 삼는 순간 리더십은 타락하며, 구도자의 자세를 잃은 스승은 성장을 멈춘다. 스스로를 완성된 존재로 여기기 시작할 때, 스승은 이미 스승이기를 그친 것이다. 진짜 스승은 제자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진리의 길을 걷는 선배 구도자로서 곁에 선다.
카를 야스퍼스가 세상을 떠났을 때, 제자 해나 아렌트는 깊은 경의를 담은 추모사를 남겼다. 야스퍼스는 학생을 일방적인 가르침의 대상이 아닌 대화의 파트너로 여겼고, 나치의 폭압에도 유대인 아내를 끝까지 지켜내며 삶으로 자신의 철학을 증명했다. 아렌트는 무엇보다 ‘경청의 정밀함’을 배웠다고 고백한다. 침묵 속에 지나치기 쉬운 것을 대화 자리로 끌어올리는 능력, 상대를 바꾸고 넓히고 날카롭게 하면서도 상대 위에 서지 않는 태도. 야스퍼스에게 진리와 소통은 하나였고, 그것은 강단의 명제가 아니라 매일의 삶에서 실천된 것이었다. 그를 향해 아렌트는 고백한다. “당신의 삶은, 홍수가 몰려오는 것 같은 악조건 속에서도 인간들이 서로 어떻게 대화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모범입니다.” 아렌트의 글 전체가 담고 있는 핵심은 하나다. 야스퍼스의 존재 자체가 세상이 여전히 인간이 살 만한 곳임을 증언했다는 것. 이보다 더 큰 찬사가 또 있을까.
지식은 넘쳐나지만 지혜는 희귀하고, 전문가는 많으나 스승은 드문 시대다. 모든 것이 빠르게 소비되는 시대, 사람들은 짧은 자극에 익숙해지고 깊이 기다리는 법을 잃어간다. 스승의 영향은 느리고 조용하게 스며드는 것인데, 그 느림을 견디지 못하는 문화 속에서 스승의 자리는 좁아진다. 우리에게 필요한 이는 정답을 내놓는 권위자가 아니라, 자신의 삶으로 어두운 밤길을 비추는 사람이다. ‘학생정신’을 잃지 않은 채 묵묵히 길을 내고 있을 모든 스승에게 경의를 표한다. 그들이 가리키는 손가락 끝에서, 우리가 가야 할 먼 빛을 본다.
김기석 청파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