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독 전문 의사이자 윤리학자인 칼 에릭 피셔(미국 컬럼비아대 임상정신의학과 부교수)가 인터뷰 중 스마트폰을 보여줬다. 흑백 화면에 전화, 문자메시지, 메일 앱만 깔렸다. “스마트폰 유혹·자극에 반응하지도 않도록 이렇게 설정한 거죠.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지 않으려고요.” 그는 “스마트폰과 소셜미디어가 ‘불편한 감정과 함께 머물며 나 자신으로 존재하는 법’을 배울 기회를 앗아간다”며 “무엇에 마음을 쏟을지 스스로 정하려는 삶의 자세”라고도 했다.
중독 전문 의사인 칼 에릭 피셔는 “중독이 우리 모두의 문제”라고 여긴다. 그는 “규제나 금지, 낙인보다 연결과 총체적 지원과 다원적 해결책이 더 중요하다”고 했다. 회복은 “‘삶의 의미’를 다시 찾는 과정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피셔가 지난 3월28일 경향신문사 여다향에서 사진 촬영을 하고 있다. 김종목 기자
피셔의 스마트폰 화면 설정을 보며 그의 과거를 떠올렸다. 그는 ‘중독증을 가진 사람’이었다. 2000년대 중반 대학 학부를 졸업한 첫해 한국 신경과학연구소 특별연구원 자격으로 서울에 오고는 “매일 밤 자정이 한참 넘은 시간까지 밖에 있거나 아니면 집에서 선녹색의 작은 병에 담긴 소주를 병째” 들이켜곤 했다. “컬럼비아 의과대학을 다니며 엄청난 성취”를 이룰 때도 알코올 중독에 빠져 있었다. 술에 취하면 노골적인 폭언으로 일련의 선을 넘기도 했다. 부인(Denial)이란 방어기제로 자신은 아무 문제가 없다고 믿었다.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생각했다. 중독자들을 자기보다 낮은 부류 사람들이라고 여겼다. 이후 금주, 재활, 회복을 거치면서 “중독이 우리 모두의 문제”라고 확신했다.
※인터뷰 전문은 다음 링크로 들어가면 보실 수 있습니다
이 확신을 드러내는 말 중 하나가 2022년 뉴욕타임스와 보스턴 글로브의 ‘올해의 책’ <중독의 역사>(열린책들)에서 강조한 아크라시아(Akrasia)다. 피셔가 스마트폰을 보여준 것도 이 말을 설명할 때다. 그는 아크라시아를 “자신에게 해롭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현재의 유혹에 굴복해 행동하는 ‘의지의 나약함’”이라고 했다. 그는 “누구나 자신에게 이런 나약한 경향이 있다는 걸 인정하면, 자신을 유혹에 빠뜨릴 만한 상황 자체를 조심하게 된다”고 말했다. 다시 정리하면, 스마트폰을 기본 소통 도구로만 활용하는 건 “나쁜 선택을 하려는 내면의 경향을 아예 자극하지 않는 것”이자 “내 ‘의지력’에만 의존하기보다 ‘환경적 지지망’을 구축하는 것”이다.
2000년대 중반 한국에서 생활할 때
매일 병째 소주 마시던 알코올 중독
재활 이후 “우리 모두의 문제” 연구
단순한 스마트폰 설정은 다음 연구 주제와 이어진다. 스마트폰, 스크린, 비디오 게임이나 가공식품, 정크푸드 같은 ‘비약물적 중독’, 즉 ‘통제력 상실’에 관한 연구를 다음 책에 담으려 한다. 이 연구를 위해 지난 3월 한국을 방문했다. 3월28일 경향신문사에서 만난 그는 “한국의 전문가들, 경제학자들, 여러 정책 결정자가 ‘행위 중독’(약물 같은 물질이 아니라 게임, 도박, 쇼핑 같은 행동 그 자체에 중독되는 현상 등)을 어떻게 이해하는지를 배우러 왔다”고 했다. 청소년들의 심야 게임 접속을 차단했던 ‘셧다운제(강제적 셧다운제)’, 일명 ‘신데렐라법’ 등을 두고 “흥미로운 사례”라고 했다. 보건복지부는 2022년 발효된 세계보건기구(WHO) 국제질병분류 11차 개정판(ICD-11)에 따라 ‘게임 이용 장애(Gaming Disorder)’를 ‘질병’으로 분류하려 하고, 문화체육관광부는 게임산업 위축과 낙인 효과를 우려하는 상황도 알았다.
피셔는 ICD-11에 쓰인 단어는 ‘Disorder’인데, 한국은 ‘Disease’로 쓰는 점을 지적했다. “한국 논의를 지켜보며 제가 발견한 단어는 ‘질병(Disease)’이다. ‘Disorder’는 ‘체계가 흐트러진(out of order)’ 상태를 뜻하는데, 뇌와 관련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반드시 뇌 문제를 의미하는 건 아니다. 중독을 논할 때 ‘낙인(Stigma)’ 문제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전통적인 중독의 역사에서 ‘질병’이라고 부르는 것이 어떤 이들에게는 도움이 되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상처가 된다”고 했다. 그는 책엔 “정신 건강에서 용어는 중요하다. 우리의 방침과 태도를 형성하는 엄청난 힘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썼다. 이런 인식으로 ‘중독자’란 말보다 ‘중독증을 가진 사람’이란 말을 쓴다. “그것이 이치에 맞고 인도적이다. 용어가 낙인찍기에 실질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증거가 있다”고도 했다. 그가 ‘비난의 성격’을 지닌 용어의 위험성을 따지는 건 중독이 영구불변의 사실로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사회적 요인과 문화적 요인에 크게 좌우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피셔는 중독과 정신 건강 문제를 두고 규제·금지, 낙인보다 연결과 총체적 지원, 다원적 해결책이 더 중요하다고 여러 차례 강조하며 이렇게 말했다. “정치인들은 종종 ‘기분 좋아지는(feel-good)’ 아주 단순한 법안 하나를 통과시키는 경향이 있죠. 단순하고 좁은 내용의 규제는 사람들에게 무언가 유용한 일을 하고 있다는 착각을 줄 뿐입니다.”
비난 담긴 ‘중독자’ 표현보다
‘중독 가진 사람’ 용어가 더 적절
사람들도 ‘단순한 정답’을 원한다. 중독을 두고 ‘나쁜 놈’을 찾으려 한다. “‘사회 탓이야? 아니면 정치인 때문이야?’라며 명확한 대상을 찾으려 하죠. 사람들은 단순한 답변을 사랑합니다. 바로 모노카잘 택소필리아(Monocausal Taxophilia)죠.” ‘모든 것을 설명해주는 단 하나의 원인(Mono-causal)에 집착하는 태도(Taxo-philia)’를 뜻한다. 이런 태도에 부응하는 게 자기계발서나 건강서적 코너에 꽂힌 ‘이것만 하면 건강(부유)해진다’ 부류의 책들이다.
피셔는 중독 같은 복잡한 사회 문제는 결코 단 하나의 원인이나 해결책으로 설명될 수 없다고 본다. “역사가 주는 가장 큰 교훈은, 적절한 치료와 사회적 지지가 동반되지 않는 단순한 금지법은 더 큰 부작용과 해악을 낳는다는 점”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잠시 멈춰 서서 전체 그림을 살피는 것보다 더 중요한 메시지는 없어요.” 그는 단편적으로 소셜미디어나 마약을 금지하는 법만 만들 게 아니라 주거, 고용, 사회적 서비스, 공동체 연결, 즐거운 여가 등을 포괄적으로 지원하는 제도도 마련해야 한다고 본다. “관련 법안 통과 이후에 진정한 정신 건강을 위한 포괄적인 투자가 뒤따라야 하죠. 이것이 가장 중요한 포인트죠.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려면 여러 요소를 동시에 다루는 ‘총체적·다원적 해결책’이 필수입니다.”
단순하고 좁은 규제로는 해결 못해
금지엔 치료와 사회적 지지 동반해야
피셔는 회복 자본이란 말도 예로 들었다. “한 사람의 회복을 지탱해주는 모든 자원을 뜻하죠. 사회적 연결, 고용, 삶의 안정성, 가족, 더 나아가 삶의 방향성과 목적, 의미를 모두 포함하는 개념입니다. 중독 문제를 겪는 사람들을 도우려 할 때, ‘회복 자본’을 제공하고 강화해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는 “회복은 단순히 약을 끊는 것이 아니라 ‘삶의 의미’를 다시 찾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회복으로 가는 길은 어렵다. 혼자 해결하려 할 일이 아니다. “누군가에게 도움과 지지를 구하는 것, 그것이 가장 중요하면서도 강력한 회복의 원칙입니다. 혼자 힘으로는 정말 감당하기 힘든 일이니까요.”
회복은 ‘건강을 측정하는 진정한 척도’에 관한 답과도 이어진다. “그 척도는 ‘그 사람이 자신의 삶을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여야 하는 겁니다. 그들이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지, 어디에서 의미를 찾는지, 무엇이 그들을 꽃피우게 하는지가 핵심입니다. ‘당신에게 행복이란 무엇인가?’ ‘당신이 만개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환자가 이런 질문들을 스스로 탐구하고 자신의 삶에서 번성의 의미를 재발견하도록 돕고, 공간을 마련해줘야 해요.” 자기 돌봄과도 이어진다. “‘내가 지금 내게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배려는 무엇인가’라고 물어보는 그 행위 자체”라고 했다.
칼 에릭 피셔가 중독과 회복 문제룰 이야기하고 있다. 김종목 기자
피셔는 ‘진정한 회복의 의미’를 설명하면서 의료계에서 ‘통합 치료’가 이루어지지 않는 점도 지적했다. “중독 치료를 다른 일반적인 진료와 완전히 분리하려는 경향이 있어요. ‘중독은 저쪽으로’ ‘정신 건강은 이쪽으로’ ‘내과 질환은 또 저쪽으로’ 하는 식으로 말이죠. 중독과 정신 건강을 너무 이분법적으로 분리해놓은 거죠. 이런 시스템 때문에 도움을 절실히 원하는 환자들은 이곳저곳에서 거절당하며 마치 ‘핀볼 게임의 구슬’처럼 여기저기 튕겨 다녀야 합니다.” 그는 “진실은 이 모든 문제가 서로 얽혀 있다는 것”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그 어떤 환자도 ‘질병’ 그 자체로만 존재하지 않아요. 환자는 식단, 운동, 사회적 관계 등 삶의 모든 요소가 회복에 영향을 미치는 ‘총체적 존재’입니다. 저는 ‘통합 치료’를 의료계 최우선 과제로 꼽고 있어요.” 뉴욕 맨해튼과 브루클린에서 개인 정신과 진료실을 운영하는 피셔는 통합적인 정신 건강 진료에 중점을 두고 환자들을 만난다.
피셔는 중독을 유발하는 요소들만 불공평하게 분배되는 것이 아니라 회복의 기회도 불공평하다고 본다. 그는 책에 “가난, 계급, 인종주의, 성차별 등의 불평등 유발 요인들은 회복에 들어가 이를 유지하는 능력에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고 썼다.
현실은 중독을 가진 사람들을 처벌 대상으로만 여긴다. 한국을 비롯한 여러 국가가 처벌 중심의 대책을 내놓는다. ‘마약과의 전쟁’ 같은 대책은 ‘비난’에 치우쳐 있기도 하다. “‘마약과의 전쟁’이 실패했다고 주장하면, 자칫 범죄에 관대하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는 것도 알아요. 존스홉킨스 대학의 철학자 해나 피카드의 개념을 빌려 답하고 싶습니다. 바로 ‘비난 없는 책임’입니다.” 누군가를 ‘나쁜 사람’ 혹은 ‘치유 불가능한 환자’라고 비난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게 할 수 있다는 뜻의 말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필요한 상황에서는 당연히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게 해야 한다. 다만 우리는 ‘책임을 묻는 것’과 ‘치료를 제공하는 것’을 동시에 수행해야 한다. 처벌과 치료는 이분법적인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회복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위해 병행되어야 할 두 축”이라고 했다.
규제에 관한 이야기도 나눴다. 피셔는 규제 자체를 반대하는 건 아니라고 했다. WHO나 정책 입안자들은 술, 담배처럼 해로운 상품을 파는 산업을 ‘유해 상품 산업’이라 부르는데, 피셔는 ‘중독 공급 산업’이라 부른다. 이 산업이 인간의 욕망을 설계하고 조종할 수 있는 제품을 판매한다고 본다. “기업은 언제나 자신들의 설계 목적대로 제품을 더 많이 팔고 돈을 벌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겁니다. 만약 그 제품이 누군가에게 해를 끼칠 가능성이 있다면, 사회가 나서서 그들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고 합리적인 일이죠.”
이날 독실한 불교 신자와 대화하는 듯하다는 생각이 든 건 다음 말을 듣고서다. “인간에게 ‘우리와 그들’을 가르고 싶어 하는 매우 깊은 본능적 충동이 있다고 생각해요. ‘저 사람들이 나쁘기 때문에 나는 나쁜 사람이 아니다’라고 선을 그으며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려는 욕구죠. 정치나 종교, 모든 종류의 갈등과 싸움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죠. 인간 정신 깊은 곳에는 탐욕과 증오, 망상이 자리 잡고 있어요.” 그는 “서로 간의 연결 고리와 공통점을 찾아내는 게 이러한 탐욕과 증오, 망상을 초월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며 인터뷰 모두에 꺼낸 말을 다시 강조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 중독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게 유익합니다. 중독을 우리 모두의 보편 문제로 인식할 때, 우리는 더는 중독을 누군가의 도덕적 결함으로 보지 않게 됩니다. 대신 ‘이건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야’라고 말하게 되죠.”
피셔가 <중독의 역사>를 마무리하며 한 말도 떠올랐다. “중독이 인간의 속성이라면, 그것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중독을 끝내지 못할 것이다. 중독과 함께 지낼 방법을 찾아야 한다. 때로는 부드럽고 때로는 격렬하게 그러나 전쟁을 치르듯이 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본성에 맞서 싸우는 전쟁은 부질없는 짓이기 때문이다.”
피셔는 실제로 불교 신자였다. “명상은 회복의 여정에서 정말 중요한 부분”이라고 했다. <중독의 역사>엔 종교 사상가들이 오랫동안 생각 속의 집착을 만인에게 공통된 고통의 근원으로 인식한 점 등을 적었다. 초기 기독교 교부들이 ‘모든 형태의 영향’에서 벗어나려 했고, 불교 선승들이 근본적인 중독은 스스로를 붙잡으려는 마음, 확신과 안도를 추구하는 마음에 있다고 가르친 수행의 역사를 정리했다. 우리가 중독이라고 부르는 것과 타고난 불만족을 스스로 달래고 왜곡된 자아상을 강화하려는 다른 지속적인 시도 사이에는 실질적으로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내용의 경전도 소개한다.
첫 한국 방문 때 술 때문에 방해를 많이 받았지만, 그때 정신 수련과 수행을 시작했다고 한다. 당시 찾아간 곳은 서울 강북구 화계사다. “한국에 오면서 수염을 길게 기른 고대의 선사 같은 분을 만나 배울 거라는 환상을 갖고 있었죠. 막상 가서 만난 분은 저와 같은 고향(뉴저지) 출신인 백인 남성이었어요(웃음). ‘불교 수행은 이래야 한다’는 머릿속 고정관념이 깨지는 순간이었죠.” 그가 만난 이가 한국에선 예일, 하버드 출신으로 널리 알려진 현각 스님이었다.
피셔는 “술을 끊고 맨정신으로 회복의 단계에 들어선 것이 내겐 큰 선물이었다. 삶이 안정되면서 다시 명상에 몰입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명상은 지금도 회복을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원칙”이라고 했다.
이번 방문 때도 조계사와 봉은사에 다녀왔다고 한다. “한국 사찰 특유의 향냄새, 목탁 소리가 매우 친숙했다. ‘쇼핑의 사원’(코엑스몰) 바로 옆에 ‘부처님의 사원’(봉은사)이 나란히 있는 모습도 참 흥미롭더라”며 웃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