몬테카를로 발레단 <백조의 호수>의 공연 장면. 라보라예술기획, 영앤잎섬 제공
백조의 날개처럼 부드러운 순백의 튀튀(tutu), 머리엔 하얀 깃털을 왕관처럼 쓰고, 가녀리고 우아한 몸짓으로 춤을 추는 발레리나들. 발레 <백조의 호수> 하면 떠오르는 백조의 모습이다. 그런데 이 백조들은 다르다. 무용수들의 손끝에는 날카로운 깃털이 돋아나 있고, 근육의 결을 고스란히 드러낸 신체는 거친 뒷발질과 하악질로 야성적인 숨결을 내뿜는다.
모나코 몬테카를로 발레단의 관능적인 잔혹 동화 <백조의 호수(LAC)>가 처음으로 한국 관객을 만났다. 지난 13일 화성예술의전당을 시작으로 16~17일 서울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을 거쳐 20일 대전 공연을 앞두고 있다. 프랑스 현대무용의 거장 장 크리스토프 마이요의 안무로 2011년 모나코에서 초연한 이 작품은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던 고전 발레의 환상을 산산이 깨뜨린다.
몬테카를로 발레단 <백조의 호수>의 공연 장면. 라보라예술기획, 영앤잎섬 제공
몬테카를로 발레단 <백조의 호수>의 공연 장면. 라보라예술기획, 영앤잎섬 제공
흑백 무성영화로 막을 여는 무대는 시작부터 낯설다. 마이요는 악마의 저주로 낮에는 백조, 밤에는 인간으로 살아가는 공주 ‘오데트’와 왕자 ‘지크프리트’의 비극적인 사랑이라는 큰 틀은 유지하되, 고전 발레의 서사를 심리극에 가깝게 압축했다. 이야기의 중심은 더 이상 ‘저주받은 공주’에게만 머물지 않는다. 불안과 결핍 속에서 흔들리는 왕자, 왕과 왕비, 주변 인물들까지 다층적인 인간 군상이 무대 전면에 등장한다. 특히 인간의 욕망과 집착을 상징하는 동시에 관계를 분열하는 핵심 인물로 ‘밤의 여왕’의 존재감을 확장했다.
심리극이라고 해서 작품이 무겁기만 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치밀하게 얽힌 인물 관계와 빠른 전개 덕분에 한 편의 넷플릭스 드라마를 보듯 무대에 빠져들게 만든다. 그 중심에는 왕실의 은밀한 치정과 금기가 자리한다. 과거 왕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던 밤의 여왕, 그리고 두 사람 사이의 불륜으로 태어난 존재가 바로 흑조라는 파격적인 설정은 극적 긴장감을 끌어올린다. 선과 악의 경계가 무너진 아수라장 속에서 왕과 밤의 여왕, 왕자와 흑조가 뒤엉켜 파드되(2인무)를 추고, 이를 지켜보는 왕비의 불안은 파멸의 씨앗이 된다.
몬테카를로 발레단 <백조의 호수> 공연 장면. ⓒ Alice Blangero. 몬테카를로발레단
몬테카를로 발레단 <백조의 호수> 공연 장면. ⓒ Alice Blangero. 몬테카를로발레단
무엇보다 강렬한 것은 백조들이다. 고고하고 우아한 존재였던 백조들은 인간의 욕망과 불안, 사랑과 파멸을 끌어안은 야생의 생명체로 변모한다. 의상 디자이너 필립 기요텔이 완성한 현대적이고 파격적인 의상은 작품의 또 다른 정체성이다. 찌를 듯 뾰족한 깃털로 무장한 백조들이 거칠게 무대를 질주하며 본능적인 에너지를 폭발시키는 모습을 지켜보다 보면 묘한 쾌감이 느껴질 정도다.
120분의 러닝타임 동안 숨 쉴 틈 없이 몰아치는 파격의 힘은 관객을 매혹시키기 충분했다. 2016년 몬테카를로 발레단에 입단 후 모처럼 고국 무대에 오른 안재용은 유약하면서도 치명적인 욕망에 흔들리는 인간적인 왕자 지크프리트를 완벽하게 그려내며 박수를 받았다.
몬테카를로 발레단 <백조의 호수> 공연 장면. ⓒ Alice Blangero. 몬테카를로발레단
몬테카를로 발레단의 이토록 과감한 파격이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원작인 고전 <백조의 호수>가 가진 위상이 그만큼 견고하기 때문이다.
사실 <백조의 호수>는 태생부터 끊임없이 변화해온 작품이다. 1877년 러시아 모스크바 볼쇼이 극장에서 초연됐을 당시만 해도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형태의 작품은 차이콥스키 사후인 1895년, 마리우스 프티파와 레프 이바노프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새롭게 재안무한 버전을 기반으로 한다. 하얀 튀튀를 입은 백조 군무, 순결한 백조 ‘오데트’와 도발적인 흑조 ‘오딜’을 한 명의 발레리나가 연기하는 1인 2역의 구성, 흑조의 ‘32회전 푸에테(Fouetté)’ 등 작품의 상징적인 장면들도 대부분 이때 완성됐다.
<백조의 호수>는 시대에 따라 끊임없이 재해석되며 매번 새로운 생명력을 얻어왔다. 고전 발레의 정수로 불리면서도, 수많은 안무가들이 자신만의 시대 감각과 철학을 투영해 재창조해온 것이다.
매튜 본의 <백조의 호수> 공연 장면. 고전 발레의 상징과도 같은 우아하고 가녀린 여성 백조 대신 근육질의 남성 백조를 등장시키며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LG아트센터 제공
영국의 안무가 매튜 본의 <백조의 호수>는 그 대표적인 사례다. 1995년 초연 당시 근육질의 ‘남성 백조’들이 맨몸에 깃털 바지를 입은 채 야성적이고 역동적인 움직임을 선보인 무대는 충격 그 자체였다. 우아하고 여성적인 존재로 여겨졌던 백조의 이미지를 완전히 뒤집은 것이다. 외로운 왕자의 심리를 중심으로 재구성된 이 작품은 이후 발레 역사상 가장 혁명적인 변주로 손꼽힌다.
최근에는 무대와 의상을 미니멀하게 바꾸거나, 여성 캐릭터의 주체성을 강화한 프로덕션들도 등장하고 있다. 스웨덴 출신 안무가 알렉산더 에크만이 노르웨이 국립발레단과 선보인 <백조의 호수>는 무대 위에 실제 약 6000리터의 물을 채워 거대한 호수를 구현했다. 무용수들은 물속을 뛰어다니고 첨벙이며 원초적인 야생성을 폭발시켰다.
몬테카를로 발레단 <백조의 호수>의 공연 장면. 라보라예술기획, 영앤잎섬 제공
프랑스 현대무용 거장 안젤랭 프렐조카주는 한발 더 나아가, 아름다운 호수 위에 공장을 세우려는 개발업자와 그로 인해 삶의 터전을 위협받는 백조들의 이야기를 통해 오늘날의 생태 위기를 무대 위로 끌어 올렸다. 오데트 역시 수동적인 비운의 공주가 아니라 환경 파괴에 맞서 싸우는 주체적인 인물로 재탄생한다.
<백조의 호수>는 박제된 유물이 아니라 시대마다 새로운 질문을 던지는 살아있는 텍스트에 가깝다. 사랑과 욕망, 순수와 유혹, 인간 내면의 불안이라는 보편적인 주제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백조는 시대마다 다른 얼굴로 다시 태어나며 인간이 가진 가장 원초적인 감정들을 끊임없이 비춰낸다. 15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새로운 <백조의 호수>가 탄생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