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이 지킨 것은 유의미한 판결뿐만이 아니라 저라는 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꼭 기억하셨으면 합니다.”
강남역 여성 혐오 살인사건 10주기를 맞은 지난 17일, 온지구씨(가명)가 마이크를 잡고 말했다. 온씨는 2023년 경남 진주시 하대동의 한 편의점에서 발생한 ‘여성 혐오 폭행’ 사건의 피해자다. 그는 “10년 전 강남역 사건 피해자의 희생 덕분에 오늘의 제가 살아남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며 “감히 ‘덕분에’라는 마음을 품게 되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2016년 6월 6일 서울 마포구 홍대걷고싶은거리에서 열린 ‘여성혐오에 저항하는 모두의 1차 공동행동’에 참석한 한 여성이 여성혐오에 반대하는 스티커를 몸에 붙인채 행사를 지켜보고 있다. 서성일 기자
이날 온씨가 공개 발언한 곳은 여성의당 주최로 서울 영등포구에서 열린 ‘강남역에서 진주 편의점까지, 여성혐오에 맞선 여성들의 10년’ 대담 행사였다. 주로 SNS와 언론 인터뷰를 통해 목소리를 내온 그가 공식 석상에 나온 건 2년 만이다. 온씨는 기자와 인터뷰에서 “그동안 연대해준 분들께 감사 인사를 전할 기회가 필요했다”며 “연대자들을 직접 만나기 위해 용기를 내 나왔다”고 말했다.
온씨는 2023년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중 20대 남성 A씨에게 머리가 짧다는 이유로 폭행당했다. A씨는 온씨를 폭행하며 “너는 페미니스트니까 맞아도 된다”고 했다. 이를 말리던 50대 손님에게도 “같은 남자면서 왜 남자 편을 들지 않느냐”며 폭행했다.
법원은 지난해 10월 항소심에서 A씨에게 징역 3년을 선고하며 유의미한 판시를 내놨다. 당시 창원지법 형사1부(재판장 이주연)는 “범행 동기가 여성에 대한 근거 없는 혐오에 있다”고 밝혔다. 여성 혐오를 범죄 동기로 인정한 첫 판결이었다.
강남역에서 진주 편의점까지, 여성혐오에 맞선 여성들의 10년, 여성의당 X 제공
온씨는 가해자의 재판 과정에서 피해자가 겪는 어려움을 털어놨다. 온씨는 “재판을 지켜보면서 정작 가장 중요한 절차에서 피해자가 소외된다는 느낌을 받았다”며 “직접 발로 뛰지 않으면 수사나 재판 진행 상황을 알기 어렵고, 스스로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판사도 듣지 않는다고 느꼈다”고 말했다. 그는 “처음에는 집행유예만 아니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며 “언제든 다시 생겨날 수 있는 또 다른 피해자들을 위해서라도 좋은 선례를 남기고 싶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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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씨는 오는 11월 출소를 앞둔 A씨를 상대로 민사소송도 이어가고 있다. 사건 이후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치료를 받아온 그는 피해 사건을 계속 마주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조언도 병원에서 들었다고 했다. 그런데도 공식 자리에 나선 이유는 연대자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온씨는 “부끄럽게도 사건을 겪기 전까지는 페미니즘이나 여성혐오 문제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며 사건 직후 수많은 여성들의 분노를 보며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비로소 알게 됐다”고 말했다. 온씨는는 “도와준 사람들에게 ‘내가 나일 수 없을 때 내가 되어줘서 고맙다’고 편지를 썼는데 돌이켜 보면 저 또한 여러분이 됐던 것 같다”며 “지금도 그 기억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오늘 제가 낸 용기가 여러분이 스스로 행복한 하루를 보내는 힘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 우혜림 기자 saha@khan.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