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대통령과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가 19일 경북 안동 한 호텔에서 공동언론발표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한·일 정상이 19일 액화천연가스(LNG)와 원유 수급을 위한 협력에 뜻을 모은 것은 중동 전쟁 장기화와 호르무즈 해협 봉쇄로 초래된 양국의 에너지·공급망 위기에 공동방어선을 형성해 대응해 나가겠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양국 모두 경제·산업 전반에 중동산 에너지 의존도가 높아 중동 정세 불안에 취약한 공통의 위기 상황을 구체적인 협력 방안으로 돌파하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으로 평가된다.
이날 경북 안동에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에서 가장 눈에 띈 양국 사이의 협력은 LNG·원유 등 에너지 협력 분야다. 지난 1월 일본 나라현 나라시에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 이후 터진 중동 전쟁으로 인해 양국은 원유·LNG 등 에너지와 나프타 등 산업 필수 원자재 수급에 차질을 빚어왔다.
양국은 지난달 15일 일본 도쿄에서 열린 산업통상장관 회담에서 한·일 공급망 파트너십을 체결해 공동 대응키로 한 바 있다. 지난 3월에는 한국가스공사와 일본 최대 발전사 JERA가 LNG 수급 협력을 위해 서로 부족한 물량을 융통하는 스와프 협약을 체결했다. 이번 안동 정상회담에서는 이 같은 양국 에너지·공급망 협력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린 것으로 평가된다.
이 대통령은 이날 공동언론발표에서 지난 3월 체결된 LNG 수급 협력 협약서를 언급하며 이를 바탕으로 LNG 협력을 확대한다는 데 양 정상이 뜻을 같이했다고 밝혔다. 글로벌 LNG 시장에서 일본은 세계 2위, 한국은 3위 수입국이다.
원유 수급과 관련해서도 양국 정상은 유사시 스와프 거래를 포함한 협력을 강화하기로 했다. 이 대통령은 공동언론발표에서“수급 및 비축과 관련한 정보 공유와 소통 채널을 심화해 나가기로 했다”고 말했고, 다카이치 총리는 “상호 융통, 스와프 거래를 포함한 양국의 에너지 안보 강화를 위한 협력을 시작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강유정 청와대 수석대변인은 “산업통상부와 일본 경제산업성은 이번 정상회담을 계기로 원유, 석유제품의 스와프 및 상호공급과 관련한 민·관 대화를 장려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지난 정상회담에서 과거사 문제와 관련한 양 정상의 첫 합의사항이었던 조세이 탄광 유해 공동 감정도 진전을 보인 분야다. 지난 1월 한·일 정상회담에서 추진하기로 한 조세이 탄광 유해 유전자(DNA) 감정과 관련해서는 외교당국 간 구체적인 DNA 감정 절차와 방법에 합의했다.
이 대통령이 “작지만 매우 의미 있는 첫걸음”이라고 말한 것은 과거사 문제 가운데 덜 민감한 인도주의적 사안에서부터 협력의 실적을 쌓아감으로써 난제 해결의 단초를 찾아보겠다는 한국 정부의 의지를 표현한 것으로 풀이된다. 양 정상의 고향에서 열린 두 차례의 정상회담을 통해 쌓은 친분과 신뢰를 토대로 현안에 공동 대처함으로써 과거사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가자는 이재명 정부의 ‘투 트랙 외교’ 접근법을 보여줬다는 평가가 나온다.
안보 분야에서 양 정상은 역내 평화와 안정을 위한 한·일, 한·미·일 협력의 중요성을 재확인했다. 다만 이 대통령은 한·중·일 3국 협력의 중요성을 꺼낸 반면, 다카이치 총리는 중국을 언급하지 않고 인도·태평양 지역 내 평화와 안정을 말하는 등 인식차를 보였다.
이 대통령은 공동언론발표에서 “동북아 역내의 진정한 평화와 안정을 위해서는 한·중·일 3국이 서로 존중하고 협력하며 공통의 이익을 모색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다카이치 총리는 “인도-태평양 지역의 평화와 안정을 촉진하기 위해 일·미동맹, 한·미동맹의 전략적인 연대를 통한 억지력·대처 능력의 유지 및 강화를 포함해 양국이 능동적으로 노력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인식을 공유했다”고 말했다.
양기호 성공회대 일본학과 교수는 “에너지, 안보, 글로벌 공급망 등이 두루 논의됐다는 점에서 회담 결과를 높게 평가한다”면서 “한·일 양국 사이에 전략적 이익을 공유하는 관계가 확고하게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최은미 아산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한·일 양국 모두 대외 환경에 의한 압박이 더 큰 상황에서 서로 협력해야 할 시점이라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면서 “한국 정부로서는 양국 관계가 좋을 때 장기적 계획을 세워 과거사 문제를 전략적으로 풀어나가는 접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