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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요약

미국이 제공하는 공공재에만 기대는 시대는 지났다.

한반도 안보, 해상교통로의 안정, 반도체와 배터리 공급망, 에너지와 식량, 사이버 방어, 기후·보건 협력 등 생존과 번영에 필수적인 공공재들을 스스로 규정하고, 뜻을 같이하는 국가들과 사안별로 제공해야 한다.

안보는 미국과의 동맹을 중심에 두면서 일본·호주·유럽·아세안과의 협력을 넓히고, 기술·산업은 미국 중심 생태계에 참여하면서도 자체 연구개발 능력과 산업 기반을 키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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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공 = 경향신문&NAVER MEDIA AP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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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층적 격변 속 한국, 국제질서의 ‘공동생산자’로 나아가야

입력 2026.05.19 21:10

수정 2026.05.19 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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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재성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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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세계는 거대한 전환점에 서 있다. 변화의 표면에는 트럼프 행정부의 외교정책이 있다. 미국 우선주의, 동맹의 거래화, 통상과 안보의 결합, 강압 외교가 국제질서의 불안정을 키운다. 그러나 더 깊은 곳에서는 탈냉전 30년의 질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자유주의 국제질서, 주권국가 중심의 근대 국제질서가 동시에 흔들리고 있다. 트럼프 현상은 깊은 구조 변화의 결과에 가깝다.

첫째, 국제 공공재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었다. 무역과 금융, 공급망과 해상교통로, 기후변화와 감염병, 핵확산과 사이버 안보까지 어느 나라도 혼자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급증했다. 미국은 압도적 힘으로 공공재를 공급했지만, 세계는 너무 복잡해졌고 국내 부담도 한계에 이르렀다. 패권이 약해진 것이 아니라 패권이 감당해야 할 일이 너무 커진 것이다.

둘째, 지구화 역풍이 미국 내부를 흔들었다. 신자유주의적 지구화는 세계 경제를 키웠지만, 이익은 고르게 분배되지 않았다. 미국 내부 불평등이 깊어졌고 제조업 기반은 약해졌으며 중산층은 흔들렸다. 2008년 금융위기를 거치며 ‘왜 우리가 계속 비용을 부담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본격 제기됐다. 트럼프 현상은 이 구조적 불만 위에 서 있다.

셋째, 힘이 곧 문제 해결로 이어지지 않는다. 미국은 여전히 세계 최강국이지만, 최근 이란 전쟁이 보여주듯 힘만으로 중동의 오랜 적대관계와 종교·역사·국내 정치가 얽힌 문제를 풀 수 없었다. 패권은 힘의 총량이 아니라, 그 힘을 언제 어떻게 어떤 목적을 위해 쓸 것인가의 전략을 필요로 한다.

넷째, 미·중 전략경쟁의 성격도 길게 봐야 한다. 양국은 기술과 군사, 공급망과 표준을 둘러싸고 격렬히 경쟁하지만, 누가 이기든 일국 패권은 어렵다. 국제 공공재의 수요가 한 국가의 공급 능력을 이미 넘어섰기 때문이다. 미국이 중국을 누른다 해도 혼자 질서를 떠받칠 수 없다. 중국도 단독 패권의 부담을 짊어질 의지가 불분명하다. 기후변화, 감염병, 핵확산, AI 규제와 같은 초국가적 위협 앞에 미·중 공동 대응은 머지않아 필연이 될 수도 있다. 경쟁 속 타협을 통한 공동 리더십도 하나의 길이다.

다섯째, 신기술과 빅테크 기업의 부상이 국제 질서의 지형을 바꾸고 있다. 미래 기술 질서의 핵심축은 미·중이 될 가능성이 크지만, AI는 상용 기술에서 출발했기에 약소국과 비국가 행위자도 드론·사이버 공격·정보 조작 등에 활용할 수 있다. AI 모델과 데이터, 클라우드와 위성망, 반도체와 플랫폼을 장악한 기업들은 국가에 버금가는 영향력을 행사한다. 주권국가 중심 사고에 대한 근본적 도전이다.

다층적 격변 속 한국의 외교전략도 근본적으로 달라져야 한다. 미국이 제공하는 공공재에만 기대는 시대는 지났다. 한반도 안보, 해상교통로의 안정, 반도체와 배터리 공급망, 에너지와 식량, 사이버 방어, 기후·보건 협력 등 생존과 번영에 필수적인 공공재들을 스스로 규정하고, 뜻을 같이하는 국가들과 사안별로 제공해야 한다.

안보는 미국과의 동맹을 중심에 두면서 일본·호주·유럽·아세안과의 협력을 넓히고, 기술·산업은 미국 중심 생태계에 참여하면서도 자체 연구개발 능력과 산업 기반을 키워야 한다. 글로벌 사우스와의 신뢰 구축은 새로운 질서의 정당성 확보에 결정적이다.

앞으로의 승자는 변화의 성격을 정확히 읽고, 국내 역량을 결집하며, 국제협력의 공간을 창의적으로 활용하는 나라다. 한국에는 반도체·배터리·조선·원전·방산·디지털 기술의 강점이 있지만, 외교·안보·산업·기술·통상·교육·연구개발을 하나로 묶는 장기 국가전략이 필요하다.

‘위력의 시대’에 공존을 묻는 것은 힘의 현실을 외면하자는 뜻이 아니다. 힘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직시하되, 그 힘을 지속 가능한 공존의 규칙 속에 묶어두자는 뜻이다. 한국은 국제질서의 소비자에서 공동생산자로 나아가야 한다. 이것이 새로운 글로벌 질서를 구축하기 위한 출발점이다.

전재성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부 교수

전재성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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