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를 가해자로 지목하던 이들을 기록하고, 남기는 일


완독

공유하기

  • 카카오톡

  • 페이스북

  • X

  • 이메일

보기 설정

글자 크기

  • 보통

  • 크게

  • 아주 크게

컬러 모드

  • 라이트

  • 다크

  • 베이지

  • 그린

컬러 모드

  • 라이트

  • 다크

  • 베이지

  • 그린

본문 요약

인공지능 기술로 자동 요약된 내용입니다. 전체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 본문과 함께 읽는 것을 추천합니다.
(제공 = 경향신문&NAVER MEDIA API)

내 뉴스플리에 저장

강남역 살인사건 10주기인 17일 서울 강남구 강남역 10번 출구에 추모 포스트잇이 붙어 있다. 정효진 기자

피해자를 가해자로 지목하던 이들을 기록하고, 남기는 일

입력 2026.05.20 13:51

수정 2026.05.20 14:11

펼치기/접기

웹소설이나 웹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정의구현 장면을 떠올려보자. 이야기는 1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꿈과 희망으로 가득했던 주인공은 조력자로 믿었던 스승에게 배신당하며 자신이 바라던 미래가 막힌다. 스승은 눈 밖에 난 주인공을 음해하려 그의 동료와 지지자들을 총동원하고, 이는 국가 수준의 마녀사냥으로 번지게 된다. 그렇게 오랜 시간 고통을 견뎌온 주인공의 명예회복은 과연 어떻게 그려질까.

주인공은 “고구마”로 불리는 고난 구간을 지나, 주요 인물들이 다 모인 법정이나 황제의 전각 앞에 선다. 모두가 숨죽여 지켜보는 가운데 그동안의 모략과 거짓이 명명백백히 밝혀지고 악인들은 처벌받는다. 이후 주인공은 권력자에게서 “그동안 고생했다”는 위로를 듣고, 중립기어 어쩌고 하며 관전만 하던 이들에게서는 “억울했을 너를 감싸주지 못해 정말 미안하다”는 뻘쭘한 사과를 받는다. 그렇게 ‘사이다’ 정의가 실현되며 주인공의 이야기는 비로소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강남역 살인사건 10주기인 17일 서울 강남구 강남역 10번 출구에 추모 포스트잇이 붙어 있다. 정효진 기자

강남역 살인사건 10주기인 17일 서울 강남구 강남역 10번 출구에 추모 포스트잇이 붙어 있다. 정효진 기자

물론 현실의 정의구현은 그렇게 깔끔하게 끝나지 않는다. 많은 억울한 사건들은 보도조차 되지 못하고, 보도가 되더라도 관심을 끌지 못한 채 흐지부지되기도 한다. 하지만 정말 국가 수준의 마녀사냥으로까지 번지고 유력 권력자도 입장을 밝히며 여론을 갈라놓았던 사건이라면, 피해자보다는 가해자로 지목된 이의 억울함에 대해 오히려 많은 국민들이 목소리를 높였던 사건이라면, 가해자가 피해자였던 10대 청년의 실명을 밝히며 공격 목표를 지정해 테러를 조장했던 사건이라면, 최소한 마지막 결론은 다들 주목하고 보았을 만하지 않은가? 정말 그 스승이 억울하게 무고당한 사람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불꽃처럼 타오르던 관심은 가해자의 죄가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급속히 사그라들었다. 그렇다고 사건의 결론이 권력에 묻히거나 한 건 아니고 보도가 되긴 했다. 하지만 피해자를 무고죄로 몰아가며 얼마나 가해자가 억울했을까 감정이입하던 이들은 그들이 바라던 결과가 아닌 판결에는 무관심했다.

가해자의 반복된 자살 시도 소동에는 몇번이나 들끓던 커뮤니티들에서도 몇년이 지난 지금까지 가해자를 ‘무고의 아이콘’처럼 기억하는 이들이 많다. 반면 7년 동안 법정에서 싸워왔던 피해자는 “아니라면 욕해서 미안하다”는 뻔뻔함조차도 없는 무관심에 희망을 잃어갔다. 끝내 사과 한마디 없이 수감됐던 가해자는 지난해 출소했으며 피해자 김현진씨는 지난달 28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웹소설 속 명예회복 장면이 카타르시스를 주는 이유는 단순히 악인이 벌을 받기 때문만은 아니다. 모두가 마지막 재판에 참여해 증거를 듣고 판결에 승복하며, 그 과정에서 그동안 침묵했던 이들이 자신의 태도에 사과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사회 역시 달라지기 때문이다. 중립을 가장했던 관전자들이 “사실 나도 의심했다, 미안하다”고 말하는 그 어색한 순간이 정의가 사회적으로 완성되는 지점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그런 사과가 좀처럼 오지 않는다. 김현진씨를 가해자로 몰아세웠던 이들은 판결문이 나온 뒤에도 입을 닫았고, 그를 실명으로 공격했던 글들은 삭제되지 않은 채 인터넷 어딘가에 남아 있다. 무관심은 가장 값싼 면죄부다. 피해자를 가해자로 지목하던 이들은 자신의 오판을 마주할 필요 없이 다음 사건, 다음 분노로 이동해버린다.

강남역 사건 10주기가 다가왔다는 것을, 지난달 김현진씨의 부고를 듣고서야 알았다. 10년 동안 사후약방문식이라 할지라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디지털 성범죄와 스토킹 등에 대한 처벌법이 시행되거나 강화되었다. 그래서 나는 이 끝나지 않은 서사 속에서 ‘궁중 서기’의 역할을 맡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기록하고, 기억하고, 작은 변화들까지 하나씩 남기는 일이다. 그렇게 시간이 흐른 뒤 더 많은 이들이 그들이 간절히 원하는 결말을 맞을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이런 기록도 “예전엔 그랬었는데 요즘엔 턱도 없지”라고 말할 수 있는 시대의 한 부분이 되기를 바란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 주한나 전 미국 마이크로소프트 연구원·데이터 과학자

플랫의 다른 소식이 궁금하시다면,
뉴스레터를 구독하세요!

뉴스레터 구독
닫기

전체 동의는 선택 항목에 대한 동의를 포함하고 있으며, 선택 항목에 대해 동의를 거부해도 서비스 이용이 가능합니다.

보기

개인정보 이용 목적- 뉴스레터 발송 및 CS처리, 공지 안내 등

개인정보 수집 항목- 이메일 주소, 닉네임

개인정보 보유 및 이용기간- 원칙적으로 개인정보 수집 및 이용목적이 달성된 후에 해당정보를 지체없이 파기합니다. 단, 관계법령의 규정에 의하여 보존할 필요가 있는 경우 일정기간 동안 개인정보를 보관할 수 있습니다.
그 밖의 사항은 경향신문 개인정보취급방침을 준수합니다.

보기

경향신문의 새 서비스 소개, 프로모션 이벤트 등을 놓치지 않으시려면 '광고 동의'를 눌러 주세요.

여러분의 관심으로 뉴스레터가 성장하면 뉴욕타임스, 월스트리트저널 등의 매체처럼 좋은 광고가 삽입될 수 있는데요. 이를 위한 '사전 동의'를 받는 것입니다. 많은 응원 부탁드립니다. (광고만 메일로 나가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뉴스레터 구독
닫기

닫기
닫기

뉴스레터 구독이 완료되었습니다.

개인정보 수집 및 이용
닫기

개인정보 이용 목적- 뉴스레터 발송 및 CS처리, 공지 안내 등

개인정보 수집 항목- 이메일 주소, 닉네임

개인정보 보유 및 이용기간- 원칙적으로 개인정보 수집 및 이용목적이 달성된 후에 해당정보를 지체없이 파기합니다. 단, 관계법령의 규정에 의하여 보존할 필요가 있는 경우 일정기간 동안 개인정보를 보관할 수 있습니다.
그 밖의 사항은 경향신문 개인정보취급방침을 준수합니다.

닫기
광고성 정보 수신 동의
닫기

경향신문의 새 서비스 소개, 프로모션 이벤트 등을 놓치지 않으시려면 '광고 동의'를 눌러 주세요.

여러분의 관심으로 뉴스레터가 성장하면 뉴욕타임스, 월스트리트저널 등의 매체처럼 좋은 광고가 삽입될 수 있는데요. 이를 위한 '사전 동의'를 받는 것입니다. 많은 응원 부탁드립니다. (광고만 메일로 나가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닫기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