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 성과급 갈등은 우리 사회 현주소를 보여주는 전시장이다. 거기에는 교차하고 충돌하는 욕망들이 있고, 이를 조정하지 못하는 시스템의 다층적 무능이 있다. 타자의 욕망을 도외시하는 각자도생주의, 하나의 욕망을 앞세워 다른 욕망을 제압하려는 힘의 논리, 욕망의 시민권조차 얻지 못한 이들을 투명인간 취급하는 무감각이 있다. 무엇보다, 이렇게 중첩된 문제의 사회적 해법에 입 닫는 기이한 침묵이 있다.
역대급 수익을 내는 데 기여한 노동자들이 성과급을 요구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쟁점은 이들이 요구하는 액수가 적정하냐다. ‘적정선’의 기준은 무엇일까. 회사 내부로만 한정해본다면 사업의 중장기적 유지·발전을 침해하는 수준일 때, 성과급 때문에 연구·개발, 설비투자 등 계획에 차질이 빚어질 때 그 요구를 과도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를 따지려면 두 가지가 충족돼야 하리라고 본다. 사측이 합당한 근거를 제시할 것, 그 근거가 객관적이고 검증 가능할 것. 그런 점에서 노조가 보상체계의 투명화를 요구하는 건 합리적 노사협상을 위해서도 타당하다.
한국 사회 욕망들 전시장 삼전 사태
노동자들 불신 크게 키운 사측 불통
연대 상실해 여론 악화 자초한 노조
기이한 침묵 속 익어가는 다른 분쟁
얼마 전까지 노조 만드는 것도 어려웠던 삼성전자 노동자들이 파업불사를 선언하기에 이른 데는 사측에 대한 누적된 불신도 영향을 준 듯하다. 노조 부위원장은 조합원들에게 “분사할 거면 하고, 삼성전자는 우리가 그냥 없애버리는 게 맞다”고 했다는데, 이런 발언에선 두둑한 성과급에 대한 욕심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맹렬한 적의가 느껴진다.
이 적의의 실체는 무엇일까. 평소 사측이 노동자들과 원활히 소통했다면 사태가 이 지경이 됐을까. 파업이 가시권에 들자 사측은 전방위 여론전을 펴 노조를 이기주의 집단으로 낙인찍는 데 성공한 것처럼 보이는데, 이것이 노동자들을 자포자기 상태로 만들어 더욱 극단으로 내달리게 만든 건 아닐까. 그렇다면 그건 사측의 유능이 아니라 무능일 것이다. 설령 그렇게 해서 노조를 제압하더라도 노동자들의 적의와 체념은 더욱 넓고 깊어질 테니, ‘인재 경영’을 유독 강조해온 삼성으로선 상처뿐인 승리요, 전투에서 이기고 전쟁에서 지는 격이다.
노조를 두둔하기도 어렵다. 노동운동 기본은 연대이다. 노조와 다른 이익집단이 다른 건 연대성의 유무라고 본다. 연대는 노동운동의 가치이자 우군을 만드는 전술적 무기이다. 노동자들의 연대 노력을 사갈시해온 이들이 이번에는 ‘노동운동이 연대의 가치를 상실했다’고 개탄하는 게 가소롭지만, 고장 난 시계도 하루에 두 번은 맞는 법이다.
노조는 연대의 가치를 외면했다. 노·노 이해상충을 조율하는 데도 실패했다. 거액의 성과급을 요구하며 파업을 말하는 것이 그런 액수는 꿈도 꾸지 못할 비정규직·플랫폼 노동자를 비롯한 다수 시민에게 어떻게 비칠지 고민한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회사 안팎의 여론이 호의적이지 않은 건 노조 탓이 크다는 얘기다. 가치 상실이 전술 실패로 귀결된 셈인데, 이것도 무능이라면 무능이다. 파업에 돌입하면 긴급조정권을 발동하자는 말이 예사로 나오는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여기에 불기둥 증시에 환호하던 삼성전자 주주와 노동의 이해상충까지 포개져 문제가 더 복잡해졌다. 그나마 주주들은 단체로 목소리라도 낸다지만 역대급 이익 창출에 기여했을 1700여개 1차 하청업체, 2만여개 2차 하청업체 노동자들은 발언권도 없다. 반도체 기업 호실적은 국가적 인프라가 뒷받침돼 가능하고, 이 기업들이 받는 세제 혜택도 크다. 그런데도 반도체 기업들은 노·사·주주에게 이익을 배분하는 데 멈춰 있고, 삼성전자는 그마저도 기준을 정하지 못해 덜컹댄다.
주주자본주의가 득세하고 인공지능(AI) 도입이 가팔라지면 양극화와 이익 배분을 둘러싼 갈등이 전 산업에 걸쳐 더욱 복잡해지고 커질 것이라고 본다. 삼성전자 성과급 갈등은 그 징후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이익 배분 기준과 범위를 정하기 위한 논의가 시작돼야 하지만, ‘초과세수를 활용해 AI 시대에 대비하자’는 김용범 청와대 정책실장의 소박한 주장조차 ‘공산당’으로 매도당하는 게 현실이다. 그러는 사이에 어디선가 제2·제3의 ‘삼전 파업’이 익어가고 있는지 모른다.
정제혁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