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척의 덕항산은 한자로 德項山. 덕을 포함하기에 좀 넉넉할 줄로 알았는데, 항우(項羽)처럼 힘이 불끈 솟아나는 산이었다. 그러니 등산객에겐 그만큼 아찔, 짜릿한 산행이 아닐 수 없었다. 그 기품 있는 노랑무늬붓꽃을 따라 덕항산 정상에 도착하니 구부시령으로 넘어가는 백두대간 길목에는 이런 무심한 등산 리본. “그냥 다녀갑니다. 遷化”.
생사를 넘어서고자 목숨 걸고 수행하는 고승들도 죽음은 영원한 숙제인가 보다. 굴뚝을 벗어난 연기가 아무 자취 없이 공중을 또 빠져나가듯 이 세상을 떠나는 법은 없을까. “나무꾼도 안 다니는 길로 자기가 걸음을 옮길 수 있는 데까지 들어간 뒤 쓰러지는 거예요. 그래도 기운이 남아 있으면 낙엽 긁어서 깔고 덮고 그리고 누우신다는 거죠. 완전히 기진맥진이니까. 물이 있어 뭐가 있어요. 그냥 그대로 가는 거야. (…) 그것이 가장 멋진 죽음이죠.” 이게 바로 천화다. 좌탈입망보다 더한 저 말을 나는 저 <법정 스님의 의자>라는 다큐에서 처음 얻었다.
이번 덕항산이 초행은 아니었다. 매우 희귀한 벌깨풀, 바위종덩굴을 보려 서너 번 왔던 곳. 그렇다고 산의 비탈이 나를 봐줄 리는 없다. 단 한 걸음도 생략할 수 없는 하산길은 거의 수직이다. 최고 난도의 경사를 소화하면서 내려갈 때 은근한 기대가 하나 있었다. 몇해 전, 이 길의 끝에서 재미난 리본을 만났더랬다. 출출한 허기도 몰려오고 기진맥진하던 차에 멀리 出出이란 글씨가 뚜렷하게 보였던 것. 그것은 첩첩산중을 배경으로 꼬부라져 돌아가는 길목에서 이 산을 빠져나가는 한 출구였던가. 아뿔싸. 부산 어느 등산회에서 매단 리본의 山, 山, 山이 세로로 배열되어 잠시 내 눈을 속인 것이었다.
여기는 덕항산 등산로. 세상을 나가는 길은 많지만 세상으로 들어가는 길은 좁고 드물다. 멀리 편안한 물소리 사이로 드디어 철제 출입문이 나타났다. 주렁주렁 등산 리본 속, 그때 그 리본은 없었다. 대신 새로운 말 하나를 얻었다. “자참형예(自慚形穢)”. 자신이 뒤떨어졌다고 생각해 스스로 부끄럽게 여김. 어려운 네 글자의 리본 아래를 통과하자, 세속의 말들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아니 온 듯 그냥 다녀왔다 하기에는 제법 힘든 산행. 벌써 문명에 저항하듯 허벅지가 뻐근해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