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없는, 텅 비고 고요한…
마리 도를레앙 글·그림 | 이경혜 옮김
책스며든 | 48쪽 | 1만8000원
우리는 늘 무언가를 원한다. 좋아 보이는 것들을 사들이고, 잠시 만족하고 금세 방치한다. 갈망은 부지런하게 잉여를 만들어낸다. 집 안은 물건들로, 도로는 자동차로 가득 찬다. 우주마저도 인공위성과 우주 쓰레기로 빈틈을 잃어간다. 물질은 쌓여가는데 우리는 늘 공허하다.
한 과학자가 있다. 그는 무한함을 꿈꾸는 괴짜다. 오직 ‘정말로 텅 비어 고요한 것’을 만드는 연구에만 몰두했다. 몇년 동안 홀로 실험을 거듭한 끝에 ‘텅텅 펌프’를 만들어냈다. 작동 스위치를 누르자 커다란 틈새, 뻥 뚫린 허공 같은 곳이 나타났다. 과학자는 그 공간으로 들어갔다.
거기엔 아무것도 없었다. 먼지 한 톨 없이 텅텅. 오랜 연구로 지친 과학자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단잠을 잤다. 이 느낌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하고 싶어 기계를 알리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호기심을 보인 건 아이들이었다. 처음에는 게임기도 장난감도 없어 심심해했지만 곧 그들만의 상상력으로 새로운 놀이를 만들어냈다. 쇼핑에 중독된 어른들, 격무에 시달리는 회사원 등 많은 사람이 텅텅 펌프 속으로 들어갔다. 흐리멍덩한 눈빛이 다시 빛나고 굳은 표정은 느긋한 미소로 바뀌었다. 고요 속에서 생각은 더 깊어지고, 사람들은 진짜 쉼을 만끽했다.
어느 날 갑자기 과학자가 사라졌다. 사람들은 혼란에 빠졌다. 텅텅 펌프를 만드는 공식을 애타게 찾았지만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때 한 아이가 높은 벽 사이 벽돌 한 장을 쑥 빼내자 벽 반대편에 그토록 찾던 곳이 나타났다. 비움에 대한 불안을 무너뜨린 것은 거창한 공식이 아니라 아이의 작은 행동이었다. 내 것을 지키려 쌓아올린 벽이 허물어지자 모두의 것인 자연이 들어섰다. 사람들은 비로소 강물 소리, 새소리, 아이들이 웃는 소리를 듣게 된다. 마리 도를레앙은 ‘무’가 결핍이 아니라 무한한 풍요임을 유머러스하게 보여준다. 과감한 비움과 섬세한 채움이 교차되는 일러스트를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