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삼스럽지만 오월 광주는 우리 공동체의 역사다. ‘민중의 적’이었던 전두환과 노태우를 김대중 대통령이 사면했던 것도 광주를 모두의 역사로 만들고자 했기 때문이다. 광주는 그렇게 국가가 공인한 민주주의의 ‘성지’가 되었다. 하지만 세속의 시대, 신성한 것은 온전하기 어렵다. 불행히도 금기가 될수록 희화화되거나 폄훼된다. 세상에 만연한 원한의 정치는 적대를 혐오의 열기로 금세 바꿔낸다. 우리 공동체에선 어떤 이슈든 ‘정치’를 투과하면 열광과 혐오의 대상이 된다. 공동체의 불행이다.
최근 스타벅스의 광주 ‘모욕 마케팅’이 큰 논란이 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곧장 처벌 대상을 확대하는 5·18특별법 개정안을 내놓았다. 모욕 행위에 대해 “응징과 엄벌”로 다스릴 것이라 했다. 처벌 범위를 확대하고 수위를 높인다고 조롱과 모욕이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이 세상 곳곳에 숨겨뒀다는 이스터에그를 일일이 찾아내 단죄할 수도 없다. 모욕을 일삼는 자들은 세대를 거듭해 나타날 것이다. 모두 ‘극우에 빠진 아들을 구출했다’는 교수 엄마가 될 수도 없고 ‘민주시민교육’도 해결하지 못한다. 개조나 갱생의 ‘정의로운 청산’은 공급자 중심의 접근일 뿐이다. 세대를 이어 등장하는 그들은 우리 사회의 객관적 구조가 낳은 결과물이다. 그들 스스로가 원인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을 두드리는 방법은 필연적으로 실패한다.
한 학자는 광주에 대한 모욕이 반복되는 현실에 대해 “민주화에 대한 존경이 끝났기 때문”이라고 했다. 광주는 46년 전 과거이고 6월항쟁은 39년 전이니 틀린 말은 아니다. “과거는 외국”이다. 그렇다고 흘러간 시간 탓만은 아니다. “민주주의는 더 이상 기대와 열정을 만들어내는 단어”가 아니다. 광주정신이 그들의 삶에 가닿도록 충분히 현재화하지 못한 탓이다. 기념관의 언어로 둥둥 떠 있는 듯하다.
한강 작가는 “용산에서 망루가 불타는 영상을 보다가 나도 모르게 불쑥 중얼거렸던 것을 기억한다. 저건 광주잖아. 그러니까 광주는 고립된 것, 힘으로 짓밟힌 것, 훼손된 것, 훼손되지 말았어야 했던 것의 다른 이름이었다”고 썼다. 그에게 광주는 용산이었다. 국가에 의해 명문화되는 역사로서의 광주도 중요하다. 하지만 우리에겐 부단히 현실과 관계 맺는 광주가 필요한 건 아닐까. 현실과의 고리가 끊어진 기억은 과거일 뿐이다.
광주에 대해 생각한다. 광주는 국가폭력, 희생, 망령, 애도를 넘어 우리가 상상하고 구성해온 거의 모든 사회운동의 시작점이다. 변혁과 해방서사의 거의 모든 주체들을 발견해낸 장소이자 국가폭력과 대항폭력 그리고 반폭력이 얽히고 마주쳤던 시간이다. 자율적·대안적 공동체, 코뮌의 가능성을 발굴해낸 장소이며 거의 모든 정치적 상상력의 원천이었다. 국가를 넘어서고자 하는 이들, 부정하는 이들, 쟁취하고자 하는 이들, 봉기와 해방, 민주주의와 공동체를 둘러싼 각종 이념의 한국적 고향이다.
역설적으로 광주는 ‘민주주의의 성지’가 되면서 무해해졌다. 어쩌면 반대로 무해한 것들만 남겨놓음으로써 성지가 되었다. 광주가 무해해지면서 우리의 정치적 상상력도 궁핍해진 것일까? 모두가 계승할 만하다 했을 때 누구도 계승할 게 없어지는 서글픈 역설일까? 지배권력에 저항하고 새로운 대안을 끊임없이 상상해내는 원천으로서 광주는, 광주정신을 계승하겠다는 정당에서도 좀처럼 찾기 어렵다. 서글픈 역설이 아닐 수 없다.
김건우 참여연대 정책기획국 선임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