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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만난 길 위의 언어

입력 2026.05.25 18:12

수정 2026.05.25 2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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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신경림 시인. 경향신문 자료사진

고 신경림 시인. 경향신문 자료사진

1956년 시 ‘갈대’로 등단한 신경림은 돌연 절필하고 10여년간 전국을 떠돌았다. 전쟁 직후 폐허 속에서 존재와 실존을 따지는 문학에 환멸을 느꼈기 때문이다. 긴 방황 끝에 1973년 내놓은 <농무(農舞)>는 그가 ‘민중’을 발견하고 문학적 지평을 넓혔다고 밝힌 첫 시집이다.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시 ‘파장’)는 이 한 구절로 그는 민중을 문학의 중심으로 호출했다.

자유실천문인협회 창립을 주도하고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이력에 그의 민중은 이데올로그나 반독재 투사일 법했다. 하지만 그가 호명한 민중은 장터에서 비틀거리는 농민(‘파장’), 가난해서 사랑마저 망설이는 청년 노동자(‘가난한 사랑노래’), 남로당 출신 남편을 잃고 홀로 삶을 버텨낸 여성(‘눈길’)처럼 착하디착한 이웃들이다. “나 역시 이들과 똑같이 모자라고 나약한 존재”라는 깊은 성찰이 일군 따뜻한 발견이었다.

신 시인의 2주기 유고산문집 <산은 날더러 들꽃이 되라 하고>가 지난 18일 출간됐다. 책 제목은 그의 대표시 ‘목계장터’의 한 구절 “산은 날더러 들꽃이 되라 하고, 강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에서 따왔다. 거대한 바위가 아닌 민중과 함께 피고 뒹구는 들꽃과 잔돌이 되겠다는 평생의 다짐을 압축한 듯하다.

신 시인은 “시를 쓰는 일은 내 시로부터 도망치는 일의 반복” “희망 없는 세상에서 서정시를 쓰는 일이 옳은 일인가”(‘내 시로부터의 도망’)라고 했다. 순수서정에서 리얼리즘을 거쳐 민중적 서정에 이르기까지 시와 삶을 일치시키려 성찰을 멈추지 않았던 거장의 묵직한 고백이다. 그는 산문집을 통해 “법을 운영하는 이들이 인간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조봉암 사법 살인), “낮은 자세로 상대를 높이는 일이 중요하다”(오체투지와 소통의 문제)는 당부도 빠뜨리지 않았다. 책을 엮은 도종환 시인은 “화려한 밖을 향해 내달리는 세상에서 내면을 정직하게 응시하는 자기 탐구가 문학임을 일깨운다”고 평했다.

어디 비단 문학뿐이랴. ‘못난 놈’들의 흥겨운 정직함은 그리움이 되어버린 쓸쓸한 시절이다. 바라건대, <산은 날더러 들꽃이 되라 하고>는 다시 만난 신경림이 성찰을 멈춘 모든 ‘인간의 길’에 건네는 위로이자 경고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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