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니 롤린스가 2010년 10월 4일 일본 도쿄에서 공연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전설적인 재즈 색소포니스트 소니 롤린스가 세상을 떴다. 향년 95세.
롤린스의 웹사이트는 “소니 롤린스의 부음을 알리며 깊은 슬픔과 사랑을 느낀다. 색소폰의 거인이 25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우드스톡의 자택에서 세상을 떴다”고 밝혔다. 사인은 밝히지 않았다.
롤린스는 재즈의 전성기였던 1950년대 마일스 데이비스, 찰리 파커, 존 콜트레인, 텔로니오스 몽크, 버드 파웰 등과 함께 활동했으며, 비밥·하드밥의 부흥기를 증언하는 마지막 재즈 음악인이다. 동료 재즈 음악인들이 약물·알코올 등 온갖 요인으로 요절하는 사이, 드물게 장수한 재즈 거장이기도 하다.
롤린스는 1930년 미국 뉴욕 할렘에서 태어났다. 7살에 색소폰을 처음 배웠고 고등학교 졸업 직후 곧바로 데이비스, 파커의 후속 세대로 재즈계에 들어섰다. 롤린스는 스스로 “두뇌보다 감정을 따라간다”고 말했다. 이러한 성향은 데이비스와 파커가 개척한 비밥·하드밥·포스트밥의 부흥에 기여했고, 롤린스를 재즈 역사상 손꼽히는 즉흥 연주의 달인이라고 불리게 했다. 데이비스는 생전 롤린스를 두고 “젊은 세대 음악인들에게 전설, 혹은 거의 신과 같은 존재”라고 말했다.
롤린스는 한때 마약에 빠져 무장강도가 되기도 했으나 이후 교도소 복역과 재활 프로그램을 통해 마약을 끊었다. 1950년대 중후반부터 롤린스의 창의력은 폭발했다. 대표곡 ‘St. Thomas’가 수록된 명반 <색소폰 콜로서스(거인)>를 발표했고, 음반명은 이후 롤린스의 별명이 됐다. 미국 사회 민권운동이 거셌던 당시 이를 옹호하는 <프리덤 수트>를 발표하기도 했다. 당시 대중음악인이 사회적 발언을 하는 것은 이례적이었다. 롤린스는 음반 해설지에 “미국은 흑인 문화에 깊숙이 뿌리 내리고 있다. (…) 다른 어떤 사람보다 미국 문화를 자신의 문화라고 주장할 수 있는 흑인이 박해받고 억압당한다는 사실은 얼마나 아이러니한가”라고 적었다.
1969~1971년에는 요가, 철학, 명상을 공부하기 위해 인도로 건너가며 재즈 음악을 중단했다. 훗날 롤린스는 자신의 장수 요인 중 하나로 요가를 꼽기도 했다.
1980년대에는 롤링 스톤즈와 연주하는 등 재즈 바깥 청중에게도 다가섰다. 1998년엔 <글로벌 워밍> 음반을 발표하며 기후위기 문제를 언급했다. 롤린스는 “우리는 타이태닉호 안에 타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모두가 타이태닉호를 구경만 한다”고 훗날 말했다.
2001년 9·11 테러 당시, 롤린스의 집은 세계무역센터에서 6블록 떨어진 곳에 있었다. 롤린스는 색소폰 하나만 들고 대피했다고 한다. 롤린스는 훗날 “테러로 소중한 물건을 많이 잃었다. 중요한 것은 소유물이 아니라는 교훈을 얻었다”고 말했다.
롤린스는 생전 60장 이상의 음반을 발표했고, 2004년 그래미 평생공로상을 받았다. 2011년 버락 오바마 대통령으로부터 국가예술훈장을 받았다. 웹사이트는 생전 롤린스의 죽음에 대한 발언을 언급했다. “창의적인 사람은 세상을 뜨더라도 다른 존재로 이어집니다. 난 생이 이 모든 것의 전부가 아니라고 믿는 사람입니다. 영적인 사람은 그렇게 느끼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