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주의 국제질서 퇴조 속 한국이 갈 길은
빌라하리 카우시칸 전 싱가포르 외교부 차관
빌라하리 카우시칸 전 싱가포르 외교부 차관이 지난달 28일 싱가포르국립대학교의 한 강의실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싱가포르 | 오동욱 기자
자유무역 체제는 냉전의 산물,
이젠 이해관계 유사한 나라들이
특정 사안 중심으로 결집하게 될 것
한국, 일본·호주·인도와 더 긴밀한 협력 필요
독자적 핵 억제력 갖추고
CPTPP 가입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동맹 균열? 미국 외 대안 없어
한국 등 영리하고 기민하게 움직여야
강대국 사이 ‘선택’의 여지 생겨
“자유주의 국제질서는 하나의 도구였다. 미국이 소련에 대항하는 냉전의 무기로 고안한 것이었다. 소련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지금 미국이 굳이 같은 도구를 사용해야 할 이유가 있나? 미국은 그 도구를 완전히 버리진 않겠지만, 자국의 이익을 정의하는 데 더욱더 선택적이고 협소하며 거래적인 방식을 취하게 됐다. 이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행태다.”
빌라하리 카우시칸 전 싱가포르 외교부 차관은 자유주의 국제질서가 붕괴하는 현 상황을 이렇게 진단했다. 그는 유엔 주재 대사, 러시아 주재 대사 등을 역임하며 37년간 싱가포르 외교정책을 이끈 동아시아의 국제관계 전문가다. 국제관계에 대한 현실주의적 진단으로 지역의 주요 국제 현안에 관해 전략적 외교 원칙을 주장해왔다.
그는 국제질서가 오히려 ‘예외적 형태’에서 ‘보편적 형태’로 복귀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합의된 질서와 규범 중심의 국제질서보다 국가 간 경쟁과 거래가 치열한 지금이 오히려 일반적이라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중소국들은 리스크를 줄이고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도록 보다 영리하고 기민하게 움직여야 한다고도 했다.
경향신문은 지난달 28일 싱가포르국립대학교에 있는 한 강의실에서 그를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다. 다음은 카우시칸 전 차관과 나눈 일문일답.
- 민주주의와 인권, 유엔과 세계무역기구(WTO) 등 국제기구로 대표되는 자유주의 국제질서는 끝나가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여전히 유효하다고 보는가.
“우선 이른바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이상화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세계의 많은 나라는 자유주의 국제질서라는 개념 자체를 온전히 받아들인 적이 없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40년간은 두 가지 국제질서 이념이 대립하는 냉전의 시대였고,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지지하는 국가들조차 그 해석이 같지 않았다. (중략) 매우 짧은 기간,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부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전후까지의 약 20년간만, 다른 국제질서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 시기였다. 그 시기는 세계사적으로 매우 예외적인 기간이었다.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오히려 보편적이며, 현재의 국제질서는 국가 간 경쟁과 국가 내부의 갈등에 의해 규정되고 있다.”
- 자유무역 체제에 의존해온 중견국들은 현실적으로 어떤 외교·경제 전략을 택해야 한다고 보는가.
“자유무역 체제가 냉전의 산물이었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자유무역 체제가 완전히 붕괴하지는 않겠지만, 엄청난 압박을 받는 것만은 분명하다. 앞으로는 무역을 포함해 유사한 이해관계를 가진 국가들이 특정 사안을 중심으로 결집·재편되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국제 체제는 더 유동적으로 바뀔 것이고, 이미 일부에서는 이런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트럼프 1기 행정부가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을 탈퇴하자 일본이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을 결성한 것이 대표적 사례다. 인도와 유럽연합(EU)이 20년 동안 협상해온 자유무역협정도 최근 국제 정세의 압박으로 비로소 결실을 보았다. 변화는 이미 시작됐다. 이것이 유일한 전략이다.”
- 첨단산업 분야에서는 상호 경쟁 관계인 경우도 다수다. 중견국 연대가 실제로 힘이 될 수 있을까, 상징적 수준에 그치진 않을까.
“상징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중견국들이 협력하기 위해서는 중견국 상호 간의 관계뿐만 아니라 그들을 둘러싼 환경에 어느 정도의 안정적 토대가 갖춰져 있어야 한다. 안정적 환경은 중견국들이 스스로 제공할 수 없고, 여전히 미국이나 다른 주요 강대국들과 협력해야만 한다. 하지만 그 틀 안에서라면 협력할 수 있는 여지는 분명히 있다. 경쟁 관계에 있더라도 경쟁을 질서 있게 만들기 위해 노력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뜻이다. 중소국들이 얼마나 독창적으로, 또 정치적 의지를 실현할지가 중요하다.”
- 한국은 동맹 관계의 신뢰를 유지하면서도 자국의 산업 보호와 경제 안보를 챙겨야 해 전략적 자율성이 강조되는 상황이다. 현실적으로 가능하다고 보는가.
“충분히 가능하다고 본다. 그러려면 한국은 일본, 호주, 인도와 더 긴밀히 협력해야 한다. 한·일관계가 매우 복잡하다는 점은 잘 알지만 서로 협력하지 않았을 때 닥쳐올 상황은 훨씬 복잡하고 위험할 것이다. 둘째로 국방력을 강화해야 한다. 한국과 일본 모두 동맹 체제 내 독자적 핵 억제력을 갖춰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무역 동반자를 다변화해야 한다. 양자 또는 다자 간 협정들로 이루어진 거대한 네트워크의 망을 구축해야 한다. 농담이 아니라 CPTPP 가입을 진지하게 생각해보라. 한국이 가입된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은 그리 영향력 있는 게 아니므로 실질적인 수단들을 갖추어 나가야 한다.”
- 중국은 다자주의와 유엔 체제를 수호하는 ‘책임 있는 강대국’으로 자신을 규정한다. 하지만 국제사회에서는 신뢰가 부족하다는 평가도 있다. 중국이 추구하는 전략적 목표는 무엇이라 보나. 이를 실현할 역량을 갖추고 있나.
“우리는 강대국이든 어떤 나라든, 그들이 하는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중국이 근본적으로 원하는 것은 서구와의 접촉 이전에 존재했다고 믿는, 자국이 정점에 있던 동아시아의 위계질서를 어떤 형태로든 복원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중국이 무시할 수 없는 강대국임에도, 그것을 달성할 수 있다고는 보지 않는다. 한국이든 북한이든 중국에 대한 종속을 받아들이겠느냐고 물어보라.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일본도, 인도네시아도, 베트남도, 어느 나라도 마찬가지다. 중국이 야망은 있지만, 그것이 실현될 수 있는 건 아니다.”
- 미국의 이란 전쟁, 베네수엘라 침공, 이전 관세전쟁까지 포함해서 보면, 동맹의 균열에 대해 우려하는 목소리들이 나온다. 동맹의 균열이 현실화할 수 있다고 보나.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올해 초 유럽에 갔을 때 모두 그린란드 매입 이슈 등으로 인해 미국에 매우 화가 나 있었다. 당시 그들에게 직설적으로 말했다. ‘당신들이 왜 화가 났는지 이해하지만, 미국 없이 당신들끼리 러시아를 상대할 수 있느냐, 어떻게든 미국과 협상을 하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했다. 동아시아 지역도 마찬가지다. 누구도 미국 없이 중국을 상대할 수 있는 나라는 없다. 미국을 좋아하느냐, 미국이 신뢰할 만하다고 생각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대안이 없다는 것이 본질이다.”
- 당신은 안보 차원에서 국가들의 자력구제 노력이 심화할 것이라고 밝혀왔다. 군비경쟁이 핵확산을 자극하는 수준까지 심화할 것으로 보나.
“핵확산이라는 기차는 오래전에 역을 떠났다. 되돌릴 수 없는 흐름이라는 뜻이다. 나는 한국과 일본의 핵무장은 여부의 문제가 아니라 시기의 문제일 뿐이라고 지속해서 주장해왔다. 단순히 북한 때문만이 아니라 중국의 핵 현대화 때문이기도 하다. 중국의 핵전력 강화는 결국 미국의 핵우산에 대한 신뢰성을 약화할 것이다. 샤를 드골 프랑스 대통령이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에게 ‘미국 대통령이 파리를 구하기 위해 뉴욕을 희생할 준비가 돼 있느냐’고 물었던 것을 기억하는가? 이제 같은 질문을 우리 자신에게 대입해보자. 내 답은 ‘아니요’다.”
- 불확실성이 커진 상황에서 중소국은 강대국을 ‘선택’하는 것을 피할 수 있다고 보나.
“가능하다. 다만 우리가 얼마나 영리하고 기민하게 움직이느냐에 달려 있다. 미·중관계만 놓고 본다면 싱가포르, 한국, 일본을 포함한 국가에 두 가지 악몽 같은 시나리오가 있다. 하나는 미·중이 전쟁을 벌여 선택의 여지가 없어지는 상황이고, 또 다른 악몽은 그들이 모든 사안에 전적으로 합의해 버리는 상황이다. 중소국들이 선택할 여건이 완전히 사라지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의 경쟁은 나쁜 것이 아니다. 그 사이에서 어떻게 입지를 확보하느냐가 관건이다. 기회를 포착하는 지혜와 그 기회를 활용할 역량이 우리에게 있느냐의 문제이며 여기에는 정치적 용기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