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길이 광장에서 흔든 깃발. <일리아스>의 첫 문장을 패러디해 적었다. ⓒ정면필름
<일리아스>는 기원전 8세기 그리스 시인 호메로스가 지은 전쟁 서사시로 알려져 있다. 서양 문화의 원류가 되는 작품이지만, 1만6000행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과 복잡한 구성 때문에 읽기 어렵다. ‘누구나 알지만 읽은 사람은 드물다’는 것은 고전의 오랜 속성이기도 하다.
12·3 불법계엄부터 탄핵에 이르는 고비마다 광장에선 “분노를 노래하소서, 민중이여!”라고 적힌 노란 깃발이 휘날렸다. 놀랍게도 <일리아스>의 첫 문장 패러디였다. 불법계엄이 선포된 날의 국회, 농민과 경찰이 대치한 남태령, 윤석열 체포영장 집행을 앞둔 한강진 대통령 관저 앞, 파면 선고를 앞둔 헌법재판소…. 깃발을 흔든 20대 여성 ‘일리아스 덕후’는 고대 희랍 고전에 담긴 메시지가 오늘날의 세상을 관통한다고 믿었다. 덕후는 SNS에서 자신이 읽은 <일리아스>를 번역한 50대 남성 교수를 만났고, 고전을 더 깊이 공부하기로 해 그가 재직중인 방송통신대학교에 편입하기에 이르렀다. <일리아스 좋아하세요?>(창비)는 1996년생 사회 초년생 하길(석민주)과 1974년생 교수 이준석의 ‘교환 독서’ 기록이다. 또 2010년대 활동가와 1990년대 운동권, 각기 다른 진보 정당 당원의 정세 토론이다. 두 사람이 최근 서울 정동 경향신문사를 찾았다.
-<일리아스>에 빠진 계기는?
하길 “<일리아스>에는 오타쿠들이 좋아서 환장하는 요소가 다 들어있다. 친구 파트로클로스를 잃은 아킬레우스의 처절한 슬픔, 아킬레우스의 야수 같은 복수심, 적의 아버지인 프리아모스와의 화해…. 한마디로 ‘불꽃 같은 삶’이다. 덕후들은 이를 ‘야광 팔찌 캐릭터’라고 부른다. 뚝 부러져서 빛을 내고 사라지기 때문이다.”
이준석 “대학 1~2학년 때 <자본론>이나 레닌, 그람시만 읽었다. 군대 갔다 와서 복학했는데 IMF 구제금융 위기로 나라가 망해 있었다. 나 개인의 소멸도 시간문제니 보람 있고 즐겁게 공부하자고 생각했다. 꾸준히 공부하는 습관 들이는 데는 어학만 한 것이 없어, 라틴어 수업을 들었다. 그렇게 희랍어, 그리스 비극, 그리스 철학을 공부하다가 호메로스까지 갔다. 아직은 안 망하고 있다.”
-서로가 서로의 팬이었다고?
이 “깃발에서 고전의 구절을 지금 우리의 정치적 요구로 투사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줘 고마웠다.”
하 “선생님이 트위터에서 팔로하는 계정이 경향신문, 한겨레, 시사IN, 그리고 저까지 딱 네 개였다. 실수로 팔로하신 줄 알았다. 처음 주신 디엠(DM)을 새벽에 봤는데, 흥분돼서 잠옷 바람으로 뛰고 싶었다. ‘성덕 중의 성덕’이 된 기분이었다.”
<일리아스> 전문가인 이준석 한국방송통신대 교수(왼쪽)와 ‘일리아스 덕후’인 하길씨가 21일 서울 경향신문사에서 인터뷰 시작에 앞서 자신들의 책 <일리아스 좋아하세요?>를 소개하고 있다.2026.05.21 /서성일 선임기자
이들은 포도주의 신 디오니소스를 숭배하는 무리의 이름을 따 마이나데스라는 모임을 만들었다. 곤드레만드레 술을 마실 것 같지만, 사실 점잖은 공부 모임이다. 이준석은 “탄핵 결정이 나기까지 너무 오래 걸려서 다들 지쳤다. 탄핵이 되면 ‘떡을 돌리며 잔치를 벌이자’고 생각했다. 정신적·육체적 피로를 함께 씻어야 했다”고 말했다. 모임에선 7명이 그리스 비극을 읽고 토론한다.
-<일리아스>에서 가장 감동적인 대목은?
하 “역시 아킬레우스와 프리아모스가 화해하는 24권이다. 적장 헥토르의 시신을 훼손할 정도로 다스릴 수 없는 분노에 차 있던 아킬레우스가 헥토르의 아버지이자 비무장한 노인 프리아모스를 껴안고 눈물 흘린다. 즐기려고 하는 SNS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벌이는 장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서로의 차이와 예민함을 뒤섞은 이번 탄핵 광장이 참 좋았다. 물론 내란세력을 포용하고 연민할 수는 없다.”
이 “<일리아스>와 다른 구비문학을 구분하는 ‘시그니처’가 있다. 다른 구비문학은 승리 지상주의를 추구한다. 선악이 구분되고, 히어로가 빌런을 꺾는다. <일리아스>는 그렇지 않다. 아킬레우스의 적인 헥토르도 입체적인 인간으로 그려진다. 6권에서 헥토르는 전쟁 중 잠시 성으로 들어가 제수, 어머니, 아내를 만난다. 피 냄새가 가시는 따뜻한 장면이다. 아킬레우스는 한때 야수처럼 변해 인간이 할 수 없는 짓을 하지만, 헥토르의 주검과 함께 다시 인간이 된다.”
-<일리아스>는 고대 서사시로 드물게 신이 아닌 인간을 노래한다. 호메로스가 말하는 ‘인간다움’은 무엇인가.
하 “아킬레우스는 헥토르가 죽으면 다음은 자기가 죽을 운명이라는 것을 안다. 그래도 헥토르를 죽여 친구의 복수를 한다. 자기 생각을 이루기 위해 후퇴하지 않은 삶이 훌륭한 인간상이다.”
이 “우리는 보통 합리적(合理的) 인간을 모범으로 삼지만, 어느덧 ‘리’는 ‘理’가 아닌 ‘利’가 됐다. 아킬레우스는 재고 따지지 않는다. 유감과 회한이 남는다면 살아도 사는 게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호메로스는 아킬레우스 같은 인간에게 ‘신과 같은’이란 수식어를 붙인다. ‘신과 같은 인간’은 신일 수 없다. 생로병사에서 벗어날 수 없기에 목숨을 걸 수 있다. 반면 신들은 잃어버릴 수 없기에 걸 수 있는 것도 없다. <일리아스>에선 신이 오히려 구차한 존재다.”
-트위터에서 엑스로 이름이 바뀐 지 3년이 돼가는데, 여전히 책에선 트위터라고 쓴다.
이 “미얀마를 여전히 버마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이치다.”
하 “일론 머스크 체제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거다. 트위터를 엑스라 부르는 사람은 스페이스X 같은 주식을 하는 사람이나 테슬라 추종자뿐이다.”
하길은 한의사로 환자를 만난다. 환자를 볼 때마다 “인간은 한 가지 면으로만 읽히지 않는다는 것”을 느낀다고 한다. 이준석은 <일리아스> <오뒷세이아> <소포클레스 전집>의 희랍어 원전을 완역했고, <에우리피데스 전집> 번역을 하고 있다. ‘벽돌책 3권’ 분량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