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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팝나무와 모내기

입력 2026.05.27 20:08

수정 2026.05.27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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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준의 옆집물리학]이팝나무와 모내기

요즘 날씨 좋은 이른 아침이면 자전거 타고 싶어 엉덩이가 들썩인다. 내가 사는 수원에서 남쪽으로 난 길로 자주 가는데 집에서 3㎞ 정도 달리면 자전거길 옆으로 넓게 논이 펼쳐진 곳을 지나게 된다. 보름 전 자전거 타다 바라본 논이 찰랑이는 물로 눈부셨다. 논에 물을 댔으니 곧 모내기를 시작할 모양이다. 길게 이어진 이팝나무 가로수에는 흰 꽃이 소복하게 흐드러졌다.

청주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때만 해도 시내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논밭이 지천이었다. 겨울에 땅이 얼고 녹는 것을 되풀이하면 보리 뿌리가 흙 속에서 들뜨게 된다. 들뜬 보리 뿌리를 꾹꾹 눌러주는 것이 겨울철 보리밟기다. 보리밟기에 동원되어 추운 보리밭에 가면 수업하지 않고 떠들 수 있어 추워도 마냥 좋았다. 봄철에는 누에 먹일 뽕잎 따러 산으로 간 적도 있다. 뽕잎 따는 것은 핑계고 오디 먹는 것만 열심이었다. 잔뜩 먹어 오디로 검붉어진 혀를 기억한다. 요즘도 죠스바 먹을 때면 어릴 적 오디가 달콤하게 떠오른다.

청주 시내를 가로질러 흐르는 무심천 변 잡초 제거로 고등학교 여름방학이 시작됐고, 일 년 중 이맘때에는 모내기도 나갔다. 보리밟기와 뽕잎 따기는 한두 번에 불과했지만 중고등학교 시절 모내기 동원은 드물지 않았다. 모판에서 떼어온 연둣빛 찬란한 모를 손에 나눠 쥐고 못줄에 맞춰 허리 숙여 모를 심었다. 아직은 찬 논물에 발을 담그면 찰진 논바닥 진흙에 맨발이 푹 빠졌다. 늦봄이 지나 이제 초여름이라고 알려주는 그 느낌을 참 좋아했다. 아, 물론 거머리는 질색이었다. 금자리라고 불렀던 거머리가 물면 따끔하지도 아프지도 않아 물린 것도 몰랐다. 모내기 마치고 논에서 나와 종아리에 붙은 거머리를 떼어내려 잡아당기면 고무줄처럼 길게 늘어났다. 거머리를 피하려면 스타킹이 최고였다. 집에서 엄마 스타킹을 가져와 신는 친구들도 있었다.

모내기철보다 조금 일찍 이팝나무 꽃이 활짝 핀다. 나무 이름에 들어있는 이팝은 요즘 말로는 쌀밥인 이밥이 어원이다. 이팝나무가 쌀밥나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연원은 나무 가득 핀 이팝나무 흰 꽃을 한번이라도 보면 눈치 못 챌 도리가 없다. 흰 꽃 흐드러진 이팝나무를 멀리서 보면 영락없는 흰쌀 고봉밥이다. 이 땅에 살던 우리 선조는 이팝나무를 보면서 흰쌀밥을 떠올렸다는 것을 나무 이름이 알려준다. 우리 선조 대다수가 일 년 중 흰쌀밥을 마음껏 배불리 먹을 수 있을 때가 자주 있었을 리 없다. 가을 벼를 수확한 직후에나 가능했으리라. 봄날 이팝나무 꽃을 보며 가을날 흰쌀밥을 떠올린 이들만이 고된 한 해 농사일을 버틸 수 있었다. 그렇게 마음속에 떠올린 희망에 기대어 애써 힘내 농사지은 이들이 내 선조다. 봄날 떠올린 가을날의 희망이 길게 이어져 나를 낳았다.

농업을 시작하기 전의 선조를 떠올려보자. 사냥 나간 선조는 바로 눈앞 사냥감을 보면서 잠시 뒤 지글지글 불에 익는 맛있는 고기를 떠올릴 수 있었다. 잘 익은 과일이 달린 나무도 마찬가지다. 잠시 뒤 입안에 들어갈 과일이 지금 저기 보이는 바로 저 과일이었다. 이처럼 수렵과 채집으로 살아가던 선조에게는 먹을거리를 발견하고 그것을 먹는 일 사이의 시간 간격이 그리 길지 않았다.

농사는 다르다. 봄날의 모는 아직 이삭 팬 가을 벼가 아니며, 고개 숙인 벼는 아직 그릇에 담긴 밥이 아니다. 우리 선조는 봄날 모를 보면서 가을날의 쌀밥을 떠올린 이들이다. 최소한 반년의 시간을 앞서 미리 미래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는 선조만이 힘든 농사일을 이어갈 수 있었다.

신석기 시대 농업 혁명은 기술의 혁명이라기보다는 시간의 지평에 생긴 혁명이었다. 봄날 씨 뿌리며 가을날 밥을 떠올릴 수 있게 되면서 농업이 시작됐다.

자전거 타다 본 물 댄 논과 이팝나무로부터 어린 시절 오디와 지난주 죠스바를 거쳐 농업의 시작을 떠올려봤다. 인간은 정말 놀라운 존재다. 이팝나무에서 흰쌀 고봉밥을 떠올리듯,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아도 마음으로 볼 수 있는 존재다. 아직 내게 다가오지 않은 먼 미래의 시간을 훌쩍 건너뛰어 상상할 수 있고, 다른 이에게 닥친 일을 공간을 훌쩍 건너뛰어 내 일처럼 떠올릴 수 있는 존재다. 나쁜 과거에서 배워 미래에는 되풀이하지 않으려 애쓰는 존재, 먼 곳의 다른 이에게 일어난 일을 떠올리며 이곳에서 함께 아파할 수 있는 존재다. 과거의 광주를 기억해 계엄을 몸으로 막아낼 수 있는 존재, 저 먼 곳에서 일어난 전쟁으로 지금 죽어가는 이들을 생각하며 이곳에서 함께 슬퍼할 수 있는 존재다.

김범준 성균관대 물리학과 교수

김범준 성균관대 물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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