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은 어느 미술관의 오픈 파티 준비 장면이다. 20년이 넘은 오래된 사진이다. 보고 있으니 그사이 예술가나 미술가의 캐릭터가 얼마나 달라졌는지를 생각하게 된다.
해외의 경우를 보자. 근현대미술을 대표하는 몇몇 작가들이 있다. 폴 세잔, 빈센트 반 고흐, 폴 고갱, 파블로 피카소, 마르셀 뒤샹, 잭슨 폴록, 마크 로스코, 앤디 워홀, 요제프 보이스… 이들의 캐릭터는 과연 어땠을까.
고흐와 고갱, 폴록은 예술적 순교자, 세잔과 뒤샹은 차이는 있지만 구도자이자 혁명가, 피카소는 천재이자 혁신가이며 세속적 대성공 모델, 워홀은 통찰력 있는 비즈니스맨, 보이스는 샤먼과 예술가와 쇼맨의 캐릭터로 요약할 수 있겠다. 그러나 한 가지 공통점은 이 캐릭터들 모두 올드 모델이라는 점이다.
근래에 큰 세속적 성공을 거둔 제프 쿤스, 데이미언 허스트와 몇 작가들은 전형적인 사업가 모델이다.
선구자인 워홀이 수공업적 수준에 머무른 데 반해 이들은 회사를 차려 운영하는 경영자들이다. 거기에는 순교자도, 구도자도, 혁명가도 샤먼도 없다. 그야말로 시장을 겨냥한 노골적인 자본가로서의 경영자와 생산, 공급자로서의 캐릭터가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과거와 같은 의미의 ‘세계적인 미술’은 이제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냉정하게 말하면 미술계에 남은 것은 세계 시장뿐이고, 그 시장을 얼마나 지배하느냐가 무엇보다 중요해졌다. 그 과정에서 요구되는 재능 역시 전통적인 의미의 예술가적 자질보다는 사업가나 쇼맨에 가까운 능력으로 이동하고 있다.
우리 현대미술에서는 어떤 인물이 하나의 모델로 자리해 있는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름은 백남준과 이중섭, 박수근 등이다. 이중섭과 박수근은 구도자적 순교자의 이미지를 지니고 있고, 백남준은 한국 출신으로 세계 미술사에 이름을 남긴 극히 예외적인 혁신가의 캐릭터를 보여준다. 다른 작가들 역시 좌표를 그려본다면 두 축 사이 어딘가에 위치해 있을 것이다.
지금도 백남준은 한국 작가들의 역할 모델이 될 수 있을까? 물론 세계적 작가가 되기를 꿈꾸고 시도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많다. 하지만 그 ‘세계적 미술’이라는 것은 실체가 없다는 점에서 하나의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 환상은 환상이기에 아직도 기능한다.
하지만 이제 보다 젊은 작가들에게 백남준은 더 이상 역할 모델이 아닌 듯하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 눈앞에 펼쳐진 아트페어와 옥션 같은 시장의 가능성이다. 그 가능성은 이미 부분적으로 실현되고 있으며 언젠가 자신도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기대가 훨씬 중요해졌다. 이에 관한 사례는 너무 많아 굳이 하나하나 열거할 필요도 없어 보인다.
예술가 혹은 미술가의 캐릭터가 변했다. 이는 과거 모델들과 단절되고 있음을 뜻하며, 서구식 현대미술이 내세워온 진보성이나 아방가르드 같은 가치들이 사실상 힘을 잃었음을 보여준다. 그것은 놀랍지도 충격적이지도 않다.
문제는 시장이라는 새로운 지배적 패러다임을 완전히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데 있는지도 모른다. 작가는 더 이상 창조자도, 예언자도, 저항가도, 몽상가도 아니며 그러한 것들을 수단으로 활용하는 비즈니스맨에 가까워졌다는 것을 우리는 논리적으로는 안다.
그러나 그것을 수용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기에는 뭔가 꺼림칙하다. 그것은 윤리 때문일까, 양심 때문일까, 오래된 관습 때문일까, 어리석음 때문일까. 아니면 그 모든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