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글로벌 금융시장의 가장 중요한 변화는 장기 금리의 급등이다. 미국과 영국, 일본 등 주요 선진국의 국채 금리가 큰 폭으로 상승하고 있다. 금리 상승은 주식을 비롯한 자산시장에도 악재지만, 진짜 문제는 실물경제에 가하는 치명적인 충격에 있다. 지금의 세계 경제는 글로벌 금융위기와 코로나19 팬데믹이라는 거대한 두 차례 위기를 거치면서 부채가 비대해질 대로 비대해진 ‘과잉 부채 환경’에 놓여 있다. 특히 민간의 부실을 정부가 떠안는 과정에서 공공부채가 빠르게 증가했다. 빚이 너무 많아진 세상에서의 금리 상승은 경제의 근간을 흔드는 큰 악재가 된다.
인간 사회의 보편적인 미덕은 빚을 지면 허리띠를 졸라매고 열심히 일해서 갚아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공공부채 영역에서는 이 상식이 통하지 않는다. 정부가 지출을 과감하게 줄이는 이른바 ‘재정 긴축’을 단행하기란 정치적으로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정부부채는 어떻게 줄일 수 있을까.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경험이 좋은 사례다. 2차 대전 직후인 1946년 미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부채 비율은 무려 119.1%에 달했다. 하지만 이 비율은 1971년에 31%까지 급락하게 된다. 흥미로운 점은 미국 정부가 이 과정에서 대대적인 긴축 정책을 쓰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당시 세계 경제는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을 옹호하는 케인지안의 전성기였기에 정부 지출을 줄이는 것은 선택지에 없었다. 대신 미국은 세수의 기반이 되는 ‘성장률은 최대한 높이고’, 부채에 수반되는 비용인 ‘금리는 최대한 낮추며’, 일정 수준의 ‘인플레이션을 용인’하는 거시경제 조합을 구사하면서 부채 문제를 해결했다.
국채 금리 상승에 확장 재정 시험대
이는 실질성장률과 인플레이션의 함수인 명목성장률보다 금리를 낮게 유지하는 정책과 다름없었다. 명목성장률이 대출 금리보다 높으면 시간을 보내면서 부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이런 상황은 채무자인 정부에는 축복과도 같지만, 여윳돈을 금융기관에 맡긴 예금자(채권자)에게는 실질구매력을 약화시키는 불리한 정책, 즉 일종의 ‘금융 억압’에 가까웠다.
여기서 가장 핵심적인 연결고리는 바로 인플레이션이다. 인플레이션은 명목성장률을 끌어올리고 돈으로 갚아야 할 부채를 희석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인플레이션은 양날의 검이다. 인플레이션 통제에 실패하면 채권시장의 발작을 불러와 국채 금리가 급등하게 되고, 이는 정부의 이자 지출 부담을 폭발적으로 늘리는 자충수가 된다.
더 나아가 과도한 인플레이션은 공동체 자체를 파괴한다. 1차 세계대전 직후 독일이 겪었던 초인플레이션이 단적인 예다. 초인플레이션은 부채의 가치를 순식간에 휴지조각으로 만들어 승전국들의 부채 탕감 프로그램인 ‘도스 플랜’을 이끌어내긴 했지만, 그 과정에서 중산층을 붕괴시키고 극단주의를 키워 사회 시스템을 완전히 파괴해버렸다. 부채 희석을 위한 인플레이션 용인은 매우 정교한 조율이 필요한 외줄타기인 셈이다.
최근 일본의 행보는 2차 대전 직후 미국의 부채 해결 방정식을 현대적으로 재현하는 듯 보였다. ‘제2의 아베’를 표방하며 등장한 다카이치 사나에 내각은 왕성한 재정지출을 지속하고 있다. 그럼에도 일본의 GDP 대비 정부부채 비율은 2020년 말의 228%에서 2025년 말 206%까지 하락했다. 경제가 오랜만에 활력을 찾고 물가가 오르면서 명목성장률이 크게 상승했고, 부채 부담은 자연스럽게 희석됐다. 이 과정에서 일본의 국채 금리도 함께 상승했지만, 여전히 명목성장률을 밑도는 통제 가능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상황이 급변하고 있다. 세계 주요국 정부가 재정건전성 확보와 인플레이션 기대심리 제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놓치면서 채권시장의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랐기 때문이다. 최근 글로벌 국채 금리가 동반 상승했지만 잠재성장률과 기대 인플레이션을 감안할 때 한국과 미국은 감내할 만한 금리 레벨이고, 영국과 일본이 취약해 보인다. 이달 들어 영국과 일본의 장기 국채 금리는 향후 명목성장률 기대치를 훌쩍 뛰어넘는 파괴적인 수준까지 상승했다.
필자는 정부의 재정지출 확대를 죄악시하는 긴축주의자가 아니다. 오히려 199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이어진 일본의 ‘잃어버린 20년’ 장기 불황기 동안 일본 정부가 펼쳤던 공격적인 재정지출 확대 정책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입장이다.
정부, 효율적 사용 능력 증명해야
당시 일본 정부의 지출이 주로 지방의 토목사업에 집중되면서 예산의 효율성 측면에서 많은 비판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민간 경제가 완전히 활력을 잃은 상태에서, 정부마저 재정건전성이라는 교조적 도그마에 집착해 지출을 줄였다면 일본 사회는 훨씬 더 참혹한 추락을 경험했을 것이다. 본받을 만한 최선의 모범 사례는 아닐지언정, 급격한 자유낙하를 막아낸 최후의 완충장치 역할을 일본 정부가 해냈다는 점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국채 금리는 정부가 행하는 재정지출의 정당성과 신뢰도를 실시간으로 평가하는 ‘시장의 잣대’다. 일본이 ‘잃어버린 20년’ 동안 GDP 대비 정부부채가 50%대에서 200%대까지 급증했음에도, 당시 일본의 국채 금리는 계속 하락했다. 금리는 다름 아닌 ‘돈의 가치’이자 자금 수요와 공급의 접점이다. 당시 일본 정부가 국채를 대규모로 발행해 시중 자금을 빨아들였음에도 금리가 떨어진 이유는, 민간 경제에 자금 수요가 전무했기 때문이다. 정부가 돈을 당겨 써도 민간의 기회를 빼앗는 부작용이 없었던 시절이다.
그러나 지금의 환경은 완전히 다르다. 세계 주요국의 국채 금리가 동반 상승하고 있다는 것은, 이제 한정된 경제적 자원을 두고 정부와 민간이 경쟁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정부의 행동이 민간의 경제활동을 잠식하는 전형적인 ‘구축효과’가 채권시장에서 작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국채 금리가 급등하는 국면에서는 아무리 확장적 재정을 지지하는 진보주의자라 할지라도 채권시장의 경고를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 치솟는 국채 금리는 장기적으로 국가 재정과 경제 전체에 돌이킬 수 없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장적 재정이 꼭 필요하다면, 민간이 쓰는 것보다 정부가 이 한정된 자원을 훨씬 더 효율적이고 미래지향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확고한 능력을 시장에 증명해 보여야 한다. 채권시장은 정부에 대한 신뢰를 가격으로 평가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김학균 신영증권 리서치센터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