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력 중심의 세계 질서, 중소국들 선택은
팡에스투 인니 국제통상·다자협력 특사
마리 엘카 팡에스투 인도네시아 대통령 국제통상·다자협력 특사가 지난달 26일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 있는 그의 자택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자카르타 | 오동욱 기자
“중소국들은 미국과 중국이 주도하는 질서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고 있다. 특정 강대국에 종속되지 않으면서 양측 모두와 협력을 유지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것이 가장 현실적인 전략이다.”
마리 엘카 팡에스투 인도네시아 대통령 국제통상·다자협력 특사는 최근 심화된 미·중 경쟁 속 동남아시아국가연합(아세안) 국가들이 처한 상황을 이같이 진단했다. 팡에스투 특사는 인도네시아 무역부 장관과 세계은행 상무이사 등을 지낸 국제통상 전문가로, 오랫동안 자유무역 체제와 개발도상국의 성장 문제를 다뤄왔다. 미·중 사이에서 전략적 균형을 모색해야 하는 아세안의 현실을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경험해온 셈이다.
그는 국제 관계가 힘에 기반한 질서로 재편되는 상황을 두고 “공급망이나 가치 사슬이 경제적인 합리성에 기반해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지정학적 이유로 인해 쪼개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는 세계 경제에 심대한 피해를 줄 수 있고, 금융위기와 같은 상황에서 세계 각국의 협력을 저해하는 요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팡에스투 특사는 “미국이 글로벌 질서를 지키려는 리더십을 보이지 않고 있음을 감안하면, 이제 국제사회 모두가 나서야 한다”며 아세안을 비롯한 지역 동맹의 협력도 강조했다. 하나의 국가로서 미·중을 상대하는 것보다 지역 동맹 차원에서 대응해야 협상력을 최대화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경향신문은 지난달 26일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 있는 그의 자택에서 인터뷰를 진행했다. 다음은 팡에스투 특사와 나눈 일문일답.
- 트럼프 2기 출범 이후 국제무역에 큰 변화가 생기고 있다.
“단기적으로 상호관세의 직접적인 효과는 관리 가능한 수준이었다고 본다. 다만 중요한 것은 관세 그 자체라기보다 국가들의 대응 방식이다. 우리 정책기관 분석에 따르면 각국이 보호무역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대응하면 세계 경제에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고, 반대로 아세안이나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을 통해 지역 통합을 강화하면 상호관세의 부정적 영향을 상쇄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됐다. 이는 미국과 협상할 것은 하되, 그들의 방식이 세계 다른 지역의 무역에까지 연쇄적인 영향을 끼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 상호관세’ 중요한 건 관세 자체보다 대응방식, 보호무역 강화보다 아세안·RCEP 등 지역 통합이 부정 영향 상쇄 가능 AI 등 미·중 ‘전략 기술 경쟁’도 글로벌 무역 질서에 파장, 공급망이 경제적 합리성 기반 아닌 지정학적 이유로 쪼개져 극단적 분절화 가정, 전 세계 GDP 최대 7% 감소 예상…특정 강대국 종속 없이 협력 관계 유지할 방법 찾아야
- 미국은 중국과 인공지능(AI) 등의 전략 기술을 두고도 패권 경쟁을 하고 있다.
“현재 미국을 비롯한 각국은 기술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다양한 경제적 수단을 무기화하고 있다. 수출 통제와 투자 심사, 심지어 화웨이와 같은 기업과의 거래를 금지한 사례도 있다. 이는 기술 경쟁으로 등장한 새로운 장벽이다. 이 같은 패권 경쟁은 글로벌 무역 질서에 영향을 미치며 개발도상국에도 피해를 준다. 기술 체계가 미국과 중국으로 나뉘면 한쪽을 선택할 수밖에 없거나, 경우에 따라 두 체계를 동시에 유지하며 많은 비용을 감내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기 때문이다.”
- 구체적으로 기술 체계 분절에 따른 문제는 무엇이 있을까.
“분절화는 공급망이나 가치 사슬이 경제적 합리성에 기반해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지정학적 이유로 인해 쪼개지는 것이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세계 경제가 미국과 중국 중심의 블록으로 완전히 분절돼 무역과 기술 교류가 끊어질 경우, 전 세계 국내총생산(GDP)은 최대 7%까지 감소할 수 있다고 한다. 힘에 기반한 질서는 투자에도 영향을 주는데, 상대적으로 안전한 선진국으로 투자가 집중될 가능성이 높다. 개발도상국은 투자 기회에서도 손해를 보게 되는 것이다.”
- 중소국들은 미·중 선택의 기로에 놓이는 문제도 있다.
“중소국들은 현재 미국과 중국이 주도하는 질서 사이에서 사실상 선택을 강요받고 있다. 다만 아세안이나 인도네시아의 관점에서 보면 어느 한쪽을 택하고 싶지 않다. 특정 강대국에 종속되지 않으면서 양측 모두와 협력 관계를 유지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쉽지 않겠지만, 중소국들에는 그것이 가장 현실적인 전략이다. 이를 위해서도 지역 동맹을 가질 필요가 있다. 하나의 국가로서 미·중을 상대하는 것보다, 아세안이나 RCEP로 대응할 때 협상력은 커진다.”
- 힘에 기반한 국제질서가 글로벌 협력에 미칠 영향은.
“불안감을 느끼게 된 국가들이 서로 협력하지 않고 민족주의나 보호주의로 치우칠 가능성이 높다. 국가 간 협력이 약화되면 글로벌 협력이 필요한 문제가 방치될 수도 있다. 이란 전쟁 등으로 인해 아시아 금융위기나 세계 금융위기와 같은 상황이 다시 발생하면 세계가 예전처럼 협력해 대응할 수 있을까. 장담하기 힘들다. 기후변화나 AI 개발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사안들은 협력과 글로벌 거버넌스가 필요한데, 지금은 아무도 이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고 있다.”
- 이란 전쟁 여파는 어떻게 전망하나.
“전쟁이 당장 끝나도 석유 생산이 정상화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대부분의 예측에선 혼란의 영향이 6~9개월 정도 지속될 것으로 보고 있으며, 완전히 정상으로 돌아가지 못할 수도 있다. 인프라와 국가 간 신뢰, 공급 관계 등에 구조적 손상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이 상황에서 각국이 적절한 대응을 조율하지 않으면 에너지 확보를 위한 경쟁이 과열돼 가격이 지속 상승할 수 있다. 대부분 국가들은 이런 상황에 대비하지 못했기에 우려가 크다.”
- 이번 사태가 에너지 전환에는 어떤 영향을 미칠까.
“이번 전쟁은 각국이 에너지 전환을 가속화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특히 석유에 대한 의존도가 매우 높고 대안이 없는 국가들은 에너지 전환을 신속히 해야 한다. 인도네시아 역시 마찬가지이며, 이를 위한 계획도 마련해놓은 상태다. 다만 재생에너지 전환은 기술과 막대한 투자가 필요한 과제다. 우리는 태양광·배터리 등의 공급망 상당 부분을 중국에 의존하고 있어 지정학적 문제까지 고려해야 한다.”
- 중국이 주도하는 질서가 기존 질서를 대체할 수 있다고 보나.
“중국은 일대일로,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브릭스(브라질·러시아·인도·중국·남아프리카공화국 등 신흥국 협의체) 확대 등을 통해 영향력을 높이려 하고 있다. 하지만 위안화를 국제화하고 달러처럼 기축통화가 되게 하려면 중국이 자본 통제를 풀어야 하는데, 이는 가까운 시일 내 가능해 보이지 않는다. 중국은 성장 둔화, 고령화 등의 문제도 있다. 이를 보면 당분간은 중첩된 질서가 나타날 것이며, 우리는 미·중을 동시에 상대해야 할 것이다.”
- 힘의 질서가 아닌 규칙 기반 질서를 회복하려면 어떤 노력이 필요한가.
“미국이 글로벌 질서를 지키기 위한 리더십을 보이지 않고 있음을 보면, 이제 국제사회 모두가 나서야 한다. 미국이 하는 행동 때문에 전체 시스템이 무너지도록 내버려둬서는 안 된다. 마크 카니 캐나다 총리가 최근 다보스포럼에서 중견국들이 나서야 한다는 연설을 했는데, 사실 아세안에서는 지난 몇년간 이미 그것을 논의해왔다.”
- 아세안의 대응은 무엇인가.
“세 가지 축으로 대응하고 있다. 첫 번째는 미국과의 관계 관리다. 아세안 회원국들은 상호관세에 대해 맞대응하지 않고 미국과 개별 협상을 진행하면서도, 서로 피해를 주지 않는다는 공통 원칙을 세웠다. 엄격한 원산지 규정이나 안보 조항처럼 역내 산업에 부담 되는 요구는 공동으로 대응해 최대한 수용하지 않으려 했다. 두 번째는 내부 체력 강화다. 아시아 각국은 규제 완화와 구조 개혁을 통해 투자를 유치하고 경쟁력을 높이는 한편, 아세안과 RCEP 등을 통해 역내 경제 통합을 확대하고 있다. 세 번째는 글로벌 규칙 유지다. 세계무역기구(WTO) 개혁 논의에 참여하면서 모든 회원국 합의를 전제로 하지 않고 일부 국가만 참여하는 복수국 협정이나, 뜻을 같이하는 국가들이 자발적으로 규범을 만들어가는 ‘의지 연합’을 통해 무역 규범을 유지하려는 것이다.”
- 한국에 필요한 전략은 무엇일까.
“앞으로는 지역 협력이 매우 중요할 것이다. 아세안의 경우, 다양한 파트너와 무역 관계를 다변화하려 하는데 한국은 많은 보완성을 가지고 있다. 자동차나 전자는 물론, 음악과 영화 등 창의 경제 분야에서도 그렇다. 한국과 아세안, 그리고 한국과 인도네시아 간에는 무궁무진한 협력 가능성이 있다. 변화되는 무역 질서로 인한 위험과 불확실성에 대응하기 위해 우리는 가능한 한 많은 파트너들과 상호보완적이며 ‘윈윈’할 수 있는 협력 관계를 맺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