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청 강좌와 작가 본인의 삶 교차
‘초급 한국어’ ‘중급 한국어’ 이어
실제 삶에 소설 더해진 ‘오토픽션’
AI 시대, 이야기를 읽는다는 건
타인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경험
문지혁의 ‘한국어’ 시리즈는 저자의 실제 삶과 소설적 상상력이 더해진 글쓰기 장르인 ‘오토픽션’이다. 최근 시리즈의 세 번째 이자 마지막 책인 <실전 한국어>가 나왔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실전 한국어
문지혁 지음ㅣ민음사ㅣ268쪽ㅣ1만5000원
소설은 서사란 무엇인가에 대한 유명한 이야기로부터 시작한다. ‘왕이 죽고, 왕비도 죽었다’는 문장은 단순한 사건의 나열일 뿐이나 ‘왕이 죽자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왕비마저 죽었다’는 문장은 인과가 추가된 서사다. 여기에 왕이 죽기 전 여러 여인들과 밀회를 즐겼다는 비밀까지 추가되면 더 좋다. 독자는 점점 이 이야기의 ‘실체’가 궁금해진다. 작가와 독자가 주목하는 것이라면 이야기 안에서 실체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왕의 배신, 왕비의 집착, 사랑의 덧없음까지.
삶에서는 어떤가. 흘러가는 시간들을 붙잡아 때마다 의미를 부여하기에 우리는 너무 바쁘다. 순간의 감정들과 반복되는 사건들은 쉽게 흩어진다. 인과를 파악하기 어려운 순간들을 붙잡아 굳이 ‘서사’로 만든다면, 일기 같기도 하고 에세이 같기도 한 이 이야기들이 소설이 될 수 있을까.
소설가 문지혁의 ‘한국어’ 시리즈는 이 물음에 대한 저자 나름의 답인 듯하다. 뉴욕의 한 대학교에서 한국어 강사로 일하는 ‘나, 문지혁’의 이야기를 그린 <초급 한국어>와 한국에 돌아와 비정규직 대학 강사로 일하며 결혼과 출산이라는 생의 큰 사건들을 겪어내는 ‘나, 문지혁’의 이야기를 그린 <중급 한국어>에 이어 시리즈의 마지막 편이라 할 수 있는 <실전 한국어>가 최근 출간됐다. 세 권의 책은 각각 민음사 오늘의 젊은 작가 시리즈 30권, 42권, 56권으로 나왔다.
저자의 실제 삶과 소설적 상상력이 더해진 글쓰기 장르인 ‘오토픽션’을 표방한 이 시리즈는 실제 작가인 문지혁과 소설 속 등장인물인 문지혁 사이의 유사성과 차이점이 일종의 긴장감을 만들어낸다. 다만, 무엇이 진짜이며 소설이 어느 정도의 진실을 포함하고 있는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작가의 표현대로라면 실제 삶과 소설은 서로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평행우주’와 같기 때문이다.
앞선 두 권에 이어 진행되는 <실전 한국어>의 줄거리를 요약하자면 간단하다. 한 대학의 임용시험에 도전하지만 실패하고 구청에서 스토리텔링 강좌를 맡는 문지혁의 이야기다. 여기에 초등학교에 입학할 만큼 커버린 첫째와 어린 둘째를 돌보는 그와 아내, 그리고 주변인들의 모습이 문지혁이 가르치는 스토리텔링 수업 내용과 함께 교차한다. 총 10개 장으로 이뤄진 책의 첫 장 제목이 ‘평범한 세계’인데, 어쩌면 딱 들어맞는 표현이다.
앞선 두 권을 읽지 않아도 크게 상관없다. 강력한 사건이 등장하거나 예기치 못한 비밀이 등장하는 소설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 인간의 과거를 알지 못해도 현재의 그와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처럼, 이전의 한국어 시리즈를 몰라도 이번 책과 쉽게 사귈 수 있다.
소설을 끌고 가는 것은 삶이 던지는 우연들과 그에 반응하는 인간 문지혁의 사유들이다. “그때는 내 미래가 어떤 식으로 펼쳐질지, 어떤 글자에 가닿을지 짐작도 하지 못했다”(‘초급 한국어 ’중)거나 “인생이란 고약한 농담을 즐기는 친구 같아서, 예기치 못한 순간에 예기치 못한 표지를 과거로부터 길어 올려 눈앞에 가져다 놓는다”(‘중급 한국어’ 중) 식의 깨달음은 이번 책에서도 이어진다.
두 개의 석사 학위, 뉴욕에서의 생활, 영어 강의가 가능할 만큼 능숙한 외국어 능력이 있지만 ‘등단’은 하지 못한 소설가. 어떤 시선으로 보면 “곱게 자란 예술충 K-장남의 자의식 과잉”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것 같은 이야기가 솔직하면서도 짠한 유머를 자아내며 소설의 매력이 된다.
이는 인공지능(AI) 시대, 생성형 언어 모델이 수초 안에 규격화된 이야기를 뽑아내는 상황에서도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읽는 이유와도 연결되는지 모른다. 책에 나온 표현대로 “타인의 내면에 탑승하는 것. 다른 사람의 눈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것. 그것이야말로 호모사피엔스가 할 수 있는 가장 낯선 동시에 가장 매혹적인 경험이다.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보이는 이야기가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유일한 축복”이기에.
문장이 깔끔하고 내용이 복잡하지 않아 쉽고 빠르게 읽힌다. 너무 평범해서 지루하다고 느낄 수도 있겠으나, 이 같은 느낌의 오토픽션을 경험해 보지 않았다면 새로운 형식의 이야기를 읽을 때의 신선함이 있는 책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