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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키디데스 함정은 없다

입력 2026.05.31 20:15

수정 2026.05.31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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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투키디데스 함정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는 사실이 화제가 됐다. 투키디데스 함정은 미국 정치학자 그레이엄 앨리슨이 유행시킨 용어로서, 기존 패권국이 신흥 강대국의 부상을 위협으로 인식하면서 양국 사이 충돌의 길이 열린다는 이야기다. 앨리슨은 그 명칭을 고대 그리스 역사가 투키디데스로부터 따왔다. 투키디데스는 기원전 431~404년 벌어진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벌인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원인을 설명하면서, 페르시아 전쟁 이후 아테네의 성장을 마주한 스파르타가 느낀 공포가 전쟁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시 주석은 투키디데스 함정이 없다는 말로 미·중이 충돌의 길을 갈 이유는 없다는 메시지를 던지려 했을 것이다. 시 주석은 중국이 미국과 동등한 지위의 대국임을 강조하려 했다고 보는 해석도 있다. 무엇이든 한국인들의 질문은 하나이다. 누구 편을 들어야 하나? 미국인가 아니면 중국인가?

아테네·스파르타가 물고 뜯는 동안
뒤에서 원하는 것을 얻은 페르시아
초강대국들 간 분쟁 중간에 낀 한국
섣부르게 행동 말고 그 너머를 봐야

전광용의 소설 ‘꺼삐딴 리’를 읽는 사람들은 국제정치의 조류 변화가 한반도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성공논리, 처세술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돌이켜보게 된다. 일본이 지배하면 철저히 일본 사람처럼, 러시아가 힘을 키우면 러시아 사람처럼, 미국이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미국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것, 적어도 그런 시늉이라도 하는 것이 성공의 열쇠였다. 약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또 개인의 출세와 영달을 위해서도 바깥의 공기를 잘 읽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없었다. 해외의 흐름에 유독 민감하고 수용과 변용에 능숙한 것도 한국 사람의 무슨 특별한 K유전자가 아니라 사실 그런 역사가 만들어낸 집단 심리이다.

그러나 실제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다른 데 있다. 투키디데스는 그리스인이 볼 수 있는 범위 안에서만 세계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 세상은 스파르타와 아테네를 중심으로 움직였다. 그래서 그는 둘 사이 전쟁을 마치 인간 세계 전체의 미래를 결정할 아마겟돈 같은 것으로 그렸다.

시야를 조금만 넓혀보면 전혀 다른 그림이 나타난다. 페르시아 전쟁이 끝난 후에도 동지중해 세계의 패자는 여전히 페르시아 제국이었다. 인구와 경제력, 행정력, 영토 규모 어느 것 하나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리스인 투키디데스는 믿기 싫었겠지만 현실의 그리스는 페르시아가 지배하는 세계의 변방에 지나지 않았으며, 그 사실은 페르시아 전쟁에서 그리스가 승리를 거둔 이후에도 변함이 없었다. 사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페르시아가 지배하는 동지중해 질서의 한구석에서 벌어진 지역 강국들의 분쟁 그 이상이 아니었다.

그 결과는 무엇이었는가? 결국 웃은 것은 페르시아뿐이었다.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30년 가까이 전력을 다해 물고 뜯는 동안 페르시아는 뒤로 물러서서 이 광경을 즐겼다. 아테네가 시칠리아 원정에 실패한 후 전쟁의 저울추가 스파르타로 기울자 한편에서는 스파르타를 도우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아테네에도 손을 내밀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스파르타의 승리로 끝나자 이번에는 아테네에 자금을 대어 해군을 재건하여 스파르타에 반기를 들도록 부추겼다. 완벽한 이이제이 전략이었다. 그 결과 완전히 소진된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페르시아 왕의 중재 아래 평화조약을 체결했다. 이른바 ‘왕의 평화’였다. 조약은 사실상 페르시아가 오래전부터 원했던 질서를 승인한 것이었다.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꼴도 우스웠지만, 이들 편을 들어 죽기 살기의 전쟁을 벌인 다른 도시들의 운명은 더 비참했다. 적잖은 도시들이 흔적조차 지워졌다. 일부는 페르시아 지배 아래로 들어갔다.

우리가 이 이야기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눈앞에 비치는 그 너머를 함께 보지 못하면 중요한 것을 잃을 수 있다. 미국과 중국이라는 두 힘이 부딪치는 한중간에 서 있는 한국 같은 나라가 쉽게 행동하면 정말 위험하다.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한국의 군사·경제적 힘이 커졌기 때문에 한국의 섣부른 행동이 초강대국 간 분쟁 시발점이 될 수도 있다. 한국이 수출 1조달러를 달성하고 세계 5대 무역강국을 구성할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오는 시대다. 현재 국제질서에서 한국이 져야 하는 책임이 그만큼 커졌다. 더 많은 물건을 팔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다시 한번 펼쳐지는 초강대국 대립의 시대, 현실의 복잡성을 읽고 미래를 기획하는 통찰력, 그리고 책임의식이야말로 대한민국의 미래 전략 자산이다.

윤비 성균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윤비 성균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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