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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토리묵과 몸

입력 2026.05.31 20:18

수정 2026.05.31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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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친한 선배가 직접 쑤었다며 내게 도토리묵을 선물했다. 자신의 텃밭에서 따온 쑥갓과 상추 같은 채소도 함께 줬다. 대도시 서울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귀한 선물이었다.

돌아가신 어머니도 명절 때 도토리묵을 가끔 해주셨다. 도토리묵은 한 방향으로 오래 저어야 한다. 그래야 묵에 찰기가 생긴다. “묵 쑤다 팔 떨어진다”는 말이 나오는 까닭이다. 그래서 나는 명절 때 어머니가 묵만은 쑤지 않기를 바라기도 했다. 어머니의 고단한 삶이 묵에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선배는 묵을 가급적 당일 먹으라고 당부했고 나는 그날 바로 간장양념으로 묵을 먹었다. 큰 기대를 하지 않아서였을까? 묵은 맛있었다. 탱글탱글하면서 쌉쌀했다. 함께 준 채소는 향과 색깔이 진하고 시판 채소보다 질겼다. 어머니에 대한 추억도 떠올랐지만 원시성이 더 강하게 느껴졌다. 첩첩산중이 눈앞에 펼쳐졌다. 문명의 음식인데 문명 바깥에 있는 맛이었다. ‘내가 도토리묵을 그리워했었나?’라는 의문이 들 정도였다.

선배는 국산 도토리 가루를 물과 1 대 5의 비율로 맞춰 묵을 쑤었고 더 쌉쌀하게 먹으려면 1 대 4가 좋다고 알려줬다. 시중에서 파는 도토리묵은 대부분 중국산 도토리 가루를 쓴다. 또 묽게 쑤어 냉장 유통한다. 도토리묵은 만든 순간부터 굳는데 냉장하면 더 빨리 굳는다. 도토리묵은 이처럼 제조도 유통도 까다로워 가끔 야외에 나갈 때나 먹는 별식으로 존재해왔다.

도토리는 선사시대 이전부터 인류에게 중요한 탄수화물 공급원이었다. 농경 시작 후에도 인간은 도토리에 의존해왔다. 고려·조선 시대 도토리는 요긴한 구황작물이었고 왕도 먹었다는 기록이 있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고대 그리스는 물론 근세 유럽에서도 도토리를 먹었다. 내가 도토리를 먹고 첩첩산중을 떠올렸던 것은 내 몸에 새겨진 이런 ‘종의 기억’에서 비롯됐을지도 모른다.

누구나 이성적 판단을 하기 전에, 뭔가에 몸이 먼저 반응하는 경험이 있다. 처음 가본 장소인데 안도감을 느끼고, 처음 맡는 흙과 풀 내음에서 친숙함을 느끼는 경우다. 이성이나 논리만으로는 잘 설명되지 않는 몸의 주체적인 반응이다.

그렇지만 현대인은 이런 몸의 주체성을 잊고 산다. 모든 것을 휴대전화로 해결하는 세상이 된 탓도 크다. 음식만 해도 휴대전화로 배달시킨다. 음식이 오면 맛보다 휴대전화 사진이 먼저다. 디지털 자본의 알고리즘은 음식을 ‘만드는 것’ ‘먹는 것’이 아니라 액정에 가둬 SNS에 올리는 데이터쯤으로 전락시켰다. 맛도 영양도 뒷전이다. 알고리즘 뒤에는 인공지능(AI)이 있다. AI가 사용자 검색 기록, 클릭, 머무는 시간을 데이터화해 취향에 맞는 정보만 편식하게 만든다. 수제 도토리묵은 이런 AI 알고리즘에서는 ‘노이즈’로 분류될 법한 데이터다.

하지만 우리는 본능적으로 안다. AI시대 수제 도토리묵이 갖는 경쟁력을. 한 방향으로 팔이 떨어지게 저어야 하는 비효율성은 몸이 없는 AI가 흉내 낼 수 없는 인간 몸의 영토다. 또 거칠고 쓴 맛이 불러오는 아련한 원시성은 AI가 추론하기 어려운 인간 몸에 오랜 시간 침전된 서사다.

이런 까닭으로 팔이 떨어지더라도 나도 수제 도토리묵을 한번 만들어 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권은중 음식 칼럼니스트

권은중 음식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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