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K’ 전성시대다. 전 세계 곳곳에서 방탄소년단(BTS)의 노래가 울려 퍼지고, 한국 드라마 속 떡볶이와 길거리 패션이 지구촌의 일상을 파고든다. 최근 문화체육관광부는 정부 출범 1주년 기자간담회를 열고 괄목할 만한 성과를 발표했다. 나아가 K푸드와 뷰티, 패션까지 한데 묶어 2030년까지 ‘K컬처 400조 시대’를 열겠다는 원대한 포부도 밝혔다. 문화가 경제를 이끄는 시대라는 점에서 반가운 청사진이다.
그러나 화려한 축제의 뒤편, 여전히 그늘이 드리워진 곳들이 있다. 바로 연극, 무용, 문학, 국악 등 우리 문화예술의 뼈대를 이루는 기초예술 현장이다. 창작자들은 제작비와 인건비 상승, 공연장 대관료 부담, 불안정한 창작 환경 속에서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상당수 예술가들이 생계를 위해 여러 일을 병행하고, 안정적으로 창작을 지속할 기반도 여전히 취약하다.
정부 정책도 이런 현실을 충분히 반영하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올해 예술 분야 예산은 전년보다 늘어났지만 상업적 성과가 뚜렷한 콘텐츠 산업에 비해 기초예술 분야 지원은 상대적으로 존재감이 희미하다. 이번 간담회에서도 K팝과 관광, K라이프스타일 산업 비전은 비중 있게 소개된 반면 기초예술에 대한 구체적인 지원 방안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K컬처라는 나무가 풍성한 열매를 맺고 있는 지금, 그 뿌리를 돌보는 일에는 얼마나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지 되묻게 된다.
기초예술은 당장 눈에 보이는 조회수나 수출액으로 환산되지 않지만 K컬처의 예술적 상상력과 서사의 원천을 길러내는 토양이다. K팝의 무대 뒤에는 축적된 공연예술의 역량이 있고, K드라마의 경쟁력 뒤에는 문학과 연극의 자산이 있다. 문화선진국들이 기초예술에 꾸준히 투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프랑스는 ‘문화적 예외’ 원칙 아래 문화예술을 시장 논리만으로 평가하지 않고, 예술인 고용안전망인 ‘앵테르미탕’ 제도를 통해 창작 활동을 돕는다. 독일은 공공극장 시스템을 통해 창작 생태계를 유지한다. 당장의 흥행보다 문화적 축적 자체를 국가 경쟁력으로 보기 때문이다.
K팝과 드라마에 비해 체감은 적을 수 있지만 우리 공연예술도 세계 무대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 오는 7월 프랑스에서 열리는 세계적 공연예술 축제 ‘아비뇽 페스티벌’에서 한국어가 축제 역사상 처음이자 아시아 단일국가 언어로는 유일하게 공식 초청언어로 선정됐다. 이와 함께 우리 공연작품 9편이 공식 초청 프로그램(IN)에 이름을 올렸다. 이는 1998년 이후 28년 만의 성과로, 한국 공연예술이 축제의 중심에 선 역사적인 순간이다. 열악한 창작 환경 속에서도 뿌리를 내려온 기초예술의 저력이 세계 무대에서 꽃을 피운 셈이다.
문화정책은 성과 그래프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K컬처가 진정한 국가 브랜드가 되려면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산업뿐 아니라 그 뒤에서 토양을 만드는 기초예술도 함께 성장해야 한다. 최휘영 문체부 장관은 이번 간담회에서 기초예술 지원 계획을 묻는 질문에 “향후 예산에 적극 반영하겠다”고 밝혔다. 이제 필요한 것은 약속이 아니라 실천이다. ‘K컬처 400조 시대’도 기초예술이라는 뿌리가 건강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
노정연 문화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