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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근 칼럼]어느 날 공원에서

입력 2026.06.01 20:07

수정 2026.06.01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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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의 권유로 보기 시작한 드라마 <모든 사람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에서 한 문장이 눈에 띄었다. “갇혔을 때 돌파하세요.” 주인공 황동만이 집을 드나들 때마다 지나치는 철길 건널목의 차단기에 무심히 붙어 있는 안내문이다.

이 한 줄이 25년 전 기억을 되살렸다. 미국 요세미티 국립공원 캠핑장에 갔을 때였다. 거기서 본 곰 출현 시 대처 요령을 단계별로 적은 안내문은 이런 문장으로 끝난다. “곰이 공격할 때 맞서 싸우세요.” 캠핑 왔을 뿐인데 곰과 싸워야 한다고?

나는 칠흑 같은 캠핑장의 불안한 밤을 보내고 안전지대로 떠났지만, 황동만은 영화감독 데뷔에 거듭 실패한 뒤 사회로부터 버림받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시달린다. 드라마 인물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자기 내면의 차단기를 돌파하려 무진 애를 쓴다. 하지만 사회 공동체가 구성원들에게 전가한 불안은 각자 돌파하라고 안내해서는 안 된다. 우리 사회에는 곰과 싸워야 하는 순간으로 내몰리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는 사람들이 많다. 사람들은 곰과 싸우려고 캠핑 가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피 흘리는 전쟁 없이 싸우는 법을 발명했다. 선거다. 선거는 전쟁을 닮았지만 전쟁이 아니다. 서로 다른 이익과 가치를 가진 사람들이 무기를 들고 내전을 벌이는 대신 선택한 평화적 해결책이다. 선거는 불확실했던 상황을 규정짓고, 정립되지 않은 관계를 정의하며, 경쟁자들 사이 힘의 균형을 재조정한다.

그렇다고 선거가 좋은 정부를 선물하는 것은 아니다. 최종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도 아니다. 선거는 잠정적 다수를 확인할 뿐이다. 잠정적 다수는 언제든 다른 잠정적 다수로 갱신되고 대체될 수 있는, 유동적·임시적 다수다. 그걸 잊고 선거가 확고부동한 공동선, 일반의사를 표출했다고 믿으면, 다수 통치는 다수의 폭정, 알렉시 토크빌이 말한 ‘부드러운 전제정’이 될 수 있다.

민주주의는 깨지기 쉬운 그릇이다. 미국 정치학자 애덤 셰보르스키는 “민주주의는, 적법하게 선출된 정부가 민주주의를 전복하는 것을 막을 메커니즘을 갖지 못한 제도”라고 했다. 그런 취약점은 아돌프 히틀러, 블라디미르 푸틴,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윤석열에 의해 입증됐다. 그럼에도 집권세력이 지방선거 승리를 시민의 백지 위임장으로 여겨 대통령 공소 취소와 같은 사법부 무력화를 시도한다면, 민주주의 한계를 드러낸 사례 목록에 또 하나가 추가될 것이다.

선거와 제도만으로는 민주주의를 지키지 못한다. 정치가 작동해야 한다. 정치는 상대를, 제거할 적이 아닌 정당한 경쟁자로 받아들이고 다양한 선호를 두고 갈등하고 타협하는 일이다. 이재명 정부에서도 일어나지 않은 일이다. 이번 지방선거도 별로 기대할 게 없다. 선거가 끝나면 정치의 시간이 올 것이라는 어떤 신호도 없다.

정상적이라면, 공동체가 선거를 통해 제기한 의제를 정치가 넘겨받아 정책으로 구현하기 위한 토론과 협상을 해야 한다. 하지만 선거 결과가 정치를 그런 순방향으로 가도록 자극할 것 같지는 않다. 그보다는 양당 내 당권을 둘러싼 권력 투쟁에 동력을 제공할 가능성이 더 크다. 승자가 축하를, 패자가 위로를 받을 시간도 없이 정치 엘리트는 기득권을 위한 익숙한 정쟁 속으로 빨려들어갈 것이다.

유능한 행정도 정치를 대체할 수 없다. 행정은 주어진 과업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수행하느냐의 영역이다. 무엇이 중요한지, 무엇을 우선할지 결정하는 정치 없이는 공동체가 전진할 수 없다. 선거, 민주적 제도, 정치라는 방어벽이 이렇게 차례로 무너지면, 우리는 각자 곰과 맞서 싸워야 한다

사회가 당면한 과제들-전환기 노동 불안·지방소멸·복지확대·사회경제적 불평등·소수자 인권-은 주요 의제로 떠오르지 못했다. 우연이 아니다. 그런 의제를 대안으로 제시할 의미 있는 정치세력의 부재, 그로 인한 정치적 다원성 결핍의 필연적 귀결이다.

우리는 예측할 수 있다. 현실정치가 공동체로부터 넘겨받은 과제를 해결하느라 씨름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가 현실정치로부터 쏟아지는 정쟁의 폐기물을 떠안는 역방향의 정치가 펼쳐지리라는 것을. 폐기물로 가득한 공론장이 더욱 황폐해지리라는 것을.

이 글의 마지막 문장을 찾지 못해 집 근처 공원을 산책하다 발견한 것이 있다. 쓰레기통에 붙은 안내문이다. 다행히 곰 대처 요령은 아니었다. “가정에서 나오는 쓰레기를 여기에 버리지 말아주세요.”

우석대 석좌교수

우석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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