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의류 온라인 사이트에서 판매중인 비즈니스 하프 팬츠.
“아저씨의 다리털, 보고 싶지 않다.” 폭염 대책으로 시작된 일본 도쿄도의 ‘반바지 출근 권장’ 정책이 뜻밖의 논란으로 번지고 있다.
일본 요미우리신문 등 현지 언론 보도에 따르면, 도쿄도는 올여름 기록적 폭염에 대비해 직원들의 반바지·티셔츠 착용을 허용하는 새로운 ‘도쿄 쿨비즈’ 정책을 시행했다. 에너지 절감과 열사병 예방을 위한 조치였지만, 정책 발표 이후 예상치 못한 논쟁이 시작됐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와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다리털을 보고 싶지 않다”, “중년 남성의 반바지 차림은 불쾌하다”는 반응이 확산된 것. 반면 “부인할 수 없는 남성 차별”, “나이 든 남성에게는 인권이 없는가” 등의 반론도 이어졌다. 겉으로는 반바지 착용을 둘러싼 논란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일본 사회에 남아 있는 직장 문화의 보수성, 중년 남성을 바라보는 시선, 세대별 인식 차이가 복합적으로 충돌하면서 사회문화적 논쟁으로 확대되고 있다.
폭염 대책으로 시작된 ‘쿨반바지’
지난 4월 고이케 유리코 도쿄도지사는 여름철 폭염 대응 정책인 ‘도쿄 쿨비즈’의 일환으로 업무 성격에 따라 반바지 착용을 권장하겠다고 밝혔다. 티셔츠와 반바지 착용을 허용하는 것은 물론, 상대적으로 기온이 낮은 이른 아침 근무와 재택근무 확대까지 포함한 종합 대책이었다.
사실 일본의 ‘쿨비즈’는 이미 20년 넘게 이어져 온 국가 프로젝트다. 2005년 일본 환경성이 시작한 쿨비즈는 냉방 온도를 28도 수준으로 유지하면서도 업무 효율을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넥타이와 재킷 착용을 완화하는 정책이다. 당시 환경상이었던 고이케 지사가 직접 캠페인을 주도하며 일본 사회에 큰 변화를 이끌었다.
당시만 해도 여름철에도 넥타이와 정장을 고수하는 직장 문화가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에너지 절약과 온실가스 감축 필요성이 커지면서 넥타이를 풀고 출근하는 문화가 확산됐고, 동일본대지진 이후 전력난이 심화되자 ‘슈퍼 쿨비즈’로까지 확대됐다.
반바지 허용 역시 비슷한 맥락이다. 일본은 최근 수년간 기록적인 폭염을 반복적으로 겪고 있다. 열사병 환자가 급증하고 여름철 사망자까지 늘어나면서 “정장 문화 자체가 건강을 위협한다”는 지적도 꾸준히 제기돼 왔다. 도쿄도는 공공기관이 먼저 변화를 시도해 민간 기업 참여를 유도하겠다는 입장이다.
“다리털 싫다”…논쟁은 엉뚱한 곳으로
프리픽.
그러나 정책이 발표되자 논의는 폭염 대응이나 에너지 절감 효과보다 ‘누가 반바지를 입느냐’에 집중되기 시작했다. SNS와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직장에서 중년 남성의 맨다리를 보고 싶지 않다”, “무릎 위 반바지는 업무복으로 부적절하다”, “비즈니스 복장으로 보기 어렵다”, “청결한 느낌이 들지 않는다”는 등의 반응이 잇따랐다. 특히 정장 문화가 강한 일본 직장 사회 특성상 “반바지는 휴양지나 학생 복장 같은 느낌이 든다”, “공공기관 직원에게 기대하는 이미지와 맞지 않는다”는 의견도 적지 않았다.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성별이 바뀌었다면 용납되지 않았을 발언”, “중년 남성에 대한 외모 비하가 아무렇지 않게 소비되고 있다”, “특정 연령대 남성만 조롱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차별”이라는 반론도 제기됐다. 일부 이용자들은 “반바지가 문제인지, 중년 남성이 입는 것이 문제인지부터 구분해야 한다”며 논쟁의 초점이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고 지적했다.
온라인 공간에서는 어느새 폭염 대책보다 ‘아저씨 혐오’와 ‘남성 차별’ 논쟁이 더 큰 화제가 됐다. 젊은 남성이나 여성의 노출은 상대적으로 용인하면서 중년 남성의 신체 노출만 불쾌하다고 평가하는 반응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본의 비즈니스 매너 전문가 니시데 히로코는 현지 언론 인터뷰에서 복장 문제를 단순한 찬반 구도로 볼 사안은 아니라고 설명했다. 그는 “고객 응대가 많은 직군과 내부 업무 중심 직군은 구분해 접근할 필요가 있으며, 중요한 것은 반바지 자체가 아니라 업무 환경과 상대방에 대한 배려”라고 지적했다. 복장은 개인의 자유이면서 동시에 직장 내 커뮤니케이션 수단이라는 것이다.
해외에서도 반복된 ‘반바지 논쟁’…“반바지 안 되면 치마 입겠다“
조이 발지 당시 트위터 갈무리
비슷한 논란은 해외에서도 여러 차례 있었다. 가장 유명한 사례는 2017년 영국에서 벌어진 이른바 ‘치마 출근 시위’다. 당시 영국 남부 버킹엄셔의 콜센터에서 근무하던 20세 직원 조이 발지는 기온이 30도를 넘는 폭염 속에서 단정한 네이비색 반바지를 입고 출근했다. 그는 출근 전 자신의 SNS에 “여성은 치마나 원피스를 입을 수 있는데 남성은 왜 반바지를 입으면 안 되느냐”는 글을 올리기도 했다.
하지만 회사는 복장 규정을 이유로 그를 귀가 조치했다. 이에 발지는 집으로 돌아간 뒤 분홍색 줄무늬 원피스를 입고 다시 출근했다. 여성 직원에게는 원피스 착용이 허용된다는 점을 이용한 일종의 항의였다.
사건은 BBC와 가디언, GQ 등 주요 매체를 통해 전국적으로 알려졌고 영국 사회에서는 직장 복장 규정의 성차별 여부를 둘러싼 논쟁이 벌어졌다. 결국 회사는 남성 직원들도 무릎 아래 길이의 반바지를 착용할 수 있도록 규정을 수정했다. 당시 영국 노동조합총연맹(TUC) 역시 폭염 시기에는 기업들이 보다 유연한 복장 규정을 적용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기후위기 시대, 복장 규범도 바뀌어야
해외 전문가들은 오히려 이런 논쟁을 개인 취향이나 세대 갈등보다 기후위기와 노동 환경 변화의 관점에서 바라본다.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TIME)도 10년 전부터 이런 문제를 지적해왔다. TIME은 현재 많은 사무실 냉방 기준이 1960년대 남성 직장인을 기준으로 설계됐다고 분석하며, 복장 규정 완화는 단순한 패션 변화가 아니라 기후위기 시대의 노동 환경 변화에 맞춘 현실적 대응이라고 설명했다.
당시 기사에서는 여성들이 여름철 사무실에서 유독 추위를 느끼는 이유 중 하나로 냉방 기준 자체가 정장 차림의 남성 신체 조건을 전제로 만들어졌다는 연구 결과를 소개했다. 동시에 남성들 역시 긴 바지와 정장을 강요받는 직장 문화 때문에 폭염 속 불편을 감수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타임은 ”여성은 얇은 옷차림을 요구받고 남성은 반바지를 입지 못하는 상황 자체가 시대에 뒤떨어진 규범“이라며 결국 복장 규정과 냉방 기준 모두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세계보건기구(WHO)와 세계기상기구(WMO)는 지난해 공동 보고서에서 기후변화로 인한 직장 내 열 스트레스(heat stress)가 전 세계 노동 환경의 주요 위험 요소로 떠오르고 있다고 경고했다. 두 기관은 폭염이 노동자의 건강뿐 아니라 생산성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며, 기업들이 근무 환경과 복장 규정을 포함한 대응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영국 가디언은 최근 도쿄도의 ‘반바지 출근 허용’ 정책을 소개하며, 이번 조치가 폭염 대응뿐 아니라 에너지 절감 목적도 갖고 있다고 보도했다. 미국·이스라엘과 이란 간 군사 충돌 이후 국제 유가가 상승하면서 전력 수급 우려가 커졌고, 냉방 사용을 줄이기 위한 방안의 하나로 보다 가벼운 복장을 권장하게 됐다는 것이다.
반바지를 입고 처음 출근한 한 도쿄도청 직원은 요미우리신문에 “처음에는 솔직히 눈치가 보였다”면서도 “하지만 정말 편했고 업무 효율도 좋아질 것 같다”고 말했다. 일본 온라인에서는 여전히 중년 남성의 다리털을 둘러싼 갑론을박이 이어지고 있다. 다만 40도에 육박하는 폭염이 반복되는 시대에, 일본 사회가 결국 답해야 할 질문은 다른 곳에 있을지도 모른다. 직장인의 품위를 지키는 복장은 무엇인지, 그리고 그 기준은 변화하는 기후 앞에서도 그대로여야 하는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