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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을 막는 건 ‘계단’만이 아니다···“‘쉬운 정보’는 보이지 않는 경사로”

입력 2026.06.02 14:05

수정 2026.06.02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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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운’ 근로계약서. ‘소소한 소통’ 제공

‘쉬운’ 근로계약서. ‘소소한 소통’ 제공

“우리도 세종대왕 아니에요?”

지난 19일 만난 백정연 대표가 한 직원이 했던 말을 전했다. “지식의 독점을 타파하려 세종대왕께서 훈민정음을 만든 것 아니냐, 우리가 하는 일도 본질은 다르지 않다는 취지의 말”이라고 했다.

최근 <쉬운 정보>(유유)를 낸 백 대표는 책 제목대로 ‘쉬운 정보’를 만드는 기업 ‘소소한 소통’을 운영한다. 키오스크 주문 화면, 근로계약서, 전시 해설 등을 발달 장애인이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바꾼다. “출입구 경사로, 지하철 엘리베이터, 점자 등은 흔히 보이지만 ‘쉬운 정보’를 담은 안내판이나 키오스크 화면 등은 찾아볼 수 없다”며 “장애인에겐 물리적 접근권 못지않게 정보 접근권도 중요하다”고 했다.

“지체 장애인은 계단을 못 올라 투표가 어렵지만, 발달 장애인들은 공보물을 이해 못 해 투표소에 갈 생각조차 못 합니다. 간다고 해도 공약도 이해 못 하는 상태에서 투표하죠. 이게 투표권 행사일까요?”

그는 “정보를 이해하는 게 선택의 조건”이라며 “스스로 선택해서 결정을 내려야 장애인들이 주도적인 삶을 살 수 있다”고 했다. “‘직업 선택의 자유’도 근로조건을 이해하고 스스로 선택해서 계약서에 도장을 찍을 수 있어야 가능하다”고 했다.

“‘쉬운 정보’는 발달 장애인의 ‘경사로’인 셈이에요.”

정보 접근권에 관한 국내 인식은 열악하다. 백 대표도 한때 그랬다. 사회복지를 전공한 그는 졸업 후 장애인 관련 기관·단체에서 일하다 우연히 발달장애인법 제정 과정에 참여했다. “이 법은 의미가 있었어요. 장애인 관련 개별법으론 최초이자 지금까지도 유일하거든요. 열정을 쏟았죠. 특히 10조가 제 눈을 뜨게 했어요.”

10조는 국가와 지자체는 발달장애인이 이해하기 쉬운 형태로 주요 법령과 정책 자료를 작성·배포해야 한다고 규정한다. 문제는 ‘이해하기 쉬운 형태’가 뭔지 구체적 기준이 없다는 점이다. 법은 이를 시행령에 위임했지만, 시행령은 다시 시행규칙에 위임했다. 정작 시행규칙은 법이 만들어진 지 1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만들어지지 않았다.

“선언적 의미밖에 없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기준을 만들어 줄 기관이나 업체도 딱히 없었다. 그래서 스스로 만들기로 했다.

“영화를 좋아하는 발달장애인이 있었어요. 자조 모임 같은 데에서 보여 줄 때에만 볼 수 있었대요. 혼자서도, 친구하고도 보고 싶었는데 한 번도 못 해봤대요. ‘예매를 어떻게 하는지 몰라서요’라고 하시더라고요. ‘영어도 못 하는 내가 평생 영국에서 떠도는 느낌이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백정연 대표가 “발달장애인법은 많은 장애 자녀 부모들의 눈물로 만들어졌다”며 “그 취지를 제대로 실현하고 싶다”고 말한다. 지난  19일 서울 가산동 ‘소소한 소통’ 사무실에서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박용필 기자

백정연 대표가 “발달장애인법은 많은 장애 자녀 부모들의 눈물로 만들어졌다”며 “그 취지를 제대로 실현하고 싶다”고 말한다. 지난 19일 서울 가산동 ‘소소한 소통’ 사무실에서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박용필 기자

그는 사회적 기업 육성 제도를 이용해 자본금을 마련했다. 법인 설립부터 세금 계산서 발행까지 운영에 필요한 노하우도 배웠다. “창업 후 1년 동안 혼자서 홈페이지도 만들고, 고객 응대도 했어요. 월급을 줄만 한 형편이 못됐거든요.”

가장 어려웠던 건 ‘쉬운 정보’가 뭔지 자신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해외 사례나 연구를 닥치는 대로 읽었어요. 현지에 가서 인터뷰도 했죠. 해외에선 ‘Easy Read’(읽기 쉬운 자료), ‘Accessible Information’(접근 가능한 정보) 같은 제도가 이미 존재했거든요.”

10년에 걸쳐 그가 정립한 기준은 ‘공급자가 아닌 수용자 입장에서 설계된 정보’다. “발달 장애인들은 여러 정보를 한꺼번에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제도나 서비스 정보의 경우 가장 중요한 정보 하나를 이해시키는 데 중점을 둡니다. 전문 용어가 아닌 일상어로, 짧은 문장을 통해서요. 배경지식은 그 뒤에 차례로 부연하죠.”

다만 정보에 따라 설계 방식은 다르다. 전시 해설 등은 반대다. “깊은 이해가 필요한 정보는 이해할 준비를 먼저 시켜야 해요. 그래서 흥미를 돋우는 정보를 먼저 배치하고 배경지식을 제공한 뒤, 마지막에 예술의 주제를 전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감수 과정이다. “발달 장애인을 감수위원으로 모시고 있어요. 그들이 이해 못 하면 소용없으니까요.”

이런 기준이 자리 잡으려면 시장이 형성돼야 한다고 했다. “사업 초기에는 경쟁업체가 나타날까 봐 겁났어요. 그러나 지금은 제발 나타나길 바랍니다. 여러 업체가 경쟁을 해야 ‘쉬운 정보’의 다양성과 질도 나아질 수 있거든요. 이래서는 시장 형성조차 안 돼요.”

그는 이 분야가 돈이 안 된다고 했다. “공익적이니까 공짜로 제공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아요. 그러나 이걸 공짜로 열심히 만드는 건 지속 불가능합니다.”

정부 차원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규모에 따라 편의점 등에 경사로 설치가 의무화됐잖아요. 그게 관련 시장을 만들었어요. 정보 접근권에도 비슷한 접근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1인 기업이 직원 20명을 둔 업체가 됐다. 1인당 매출은 10년 전과 같다고 했다. “수익이 생기면 더 많은 정보를 만드는 데 투입합니다. 저희는 ‘지식의 독점 타파’라는 훈민정음 창제의 이상이 아직 실현되지 못했다고 생각하거든요.”

이는 장애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했다. “판결문을 쉽게 쓰는 교육을 한 적이 있었어요. 모르는 용어들로만 가득한 10줄짜리 문단이 모두 한 문장이었어요. 저 역시 ‘문해 약자’였습니다.“

‘쉬운 정보’는 수용자뿐 아니라 공급자에게도 필요하다고 했다. 자칫 ‘고립’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판사님들의 판결엔 나름의 이유가 있을 거예요. 그러나 그 이유를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해 관련 기사에 악플이 달리는 경우도 꽤 있다고 생각해요. 그게 납득할만 이유가 있는 판결조차 ‘억울하게’ 신뢰를 잃는 이유 중 하나이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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