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7월 이민자들이 고무보트를 타고 영국 해협을 건너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유럽연합(EU)이 난민·이민 정책을 대폭 강화하기로 했다. 보호 자격이 없는 이민자를 출신국이 아닌 제3국으로 보내고 구금 기간도 크게 늘리는 등 강경책을 도입했다. 사실상 ‘유럽판 트럼프식 이민 정책’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EU 의회와 회원국들은 1일(현지시간) 이민자 송환 절차를 강화하는 새 귀환규정에 최종 합의했다. 새 규정은 오는 12일부터 시행된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송환 허브 제도다. EU 회원국이 제3국과 협정을 맺어 해당 국가에 추방 대기 시설을 설치하고, 보호 자격이 없는 이민자를 출신국이 아닌 제3국으로 보낼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영국 보수당 정부가 추진했던 르완다 난민 이송 정책과 비슷한 방식이다.
독일·오스트리아·덴마크·그리스·네덜란드 등은 이미 수용 의향이 있는 국가를 물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개발원조 확대나 학생·취업비자 제공 등이 협상 카드로 거론된다.
미국 워싱턴포스트(WP)는 “한때 반이민 강경 우파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제3국 수용시설 구상이 이제는 유럽의 주류 정책으로 자리 잡고 있다”고 보도했다. 프랑스 일간 르몽드는 “우파와 극우 진영에게 송환 허브는 이번 협상의 대표적인 ‘전리품’”이라고 평가했다.
새 규정에는 제3국 송환 외에도 국경 통제 강화, 추방 절차 간소화 방안 등이 포함됐다. EU는 국경 외부에서 생체 정보를 수집하고 방글라데시·튀니지처럼 난민 인정률이 낮은 국가 출신 신청자에 대해서는 신속 심사를 거쳐 추방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이민자 구금 기간은 기존 최대 6개월에서 최장 30개월로 늘어난다.
EU 전역에서 효력을 갖는 ‘유럽귀환명령(ERO)’도 새로 도입된다. 지금까지는 한 회원국에서 추방 명령을 받은 이민자가 다른 회원국으로 이동해 체류를 이어가는 경우가 있었지만, 앞으로는 EU 어느 나라에서든 동일한 추방 명령이 적용된다.
지난달 28일(현지시간) 미국 뉴저지주 뉴어크에 있는 이민세관집행국(ICE) 요원들이 구금 이민자들을 수용하고 있는 딜레이니 홀 연방 이민 센터 앞에서 시위대를 제지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WP는 이번 조치로 유럽 이민 정책이 미국식 강경 노선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미 이민세관집행국(ICE)과 비슷한 대규모·고강도 단속이 확대되고, 미국이 엘살바도르와 적도기니를 활용하는 것처럼 제3국 이민자 추방도 본격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권단체와 진보 진영은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국제앰네스티와 유엔인권최고대표사무소(OHCHR) 등은 제3국 송환 제도가 유엔 난민협약의 핵심 원칙인 ‘강제송환 금지(농르풀망) 원칙’을 훼손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 원칙은 박해·전쟁·고문·생명의 위협을 피해 도망친 사람을 위험이 예상되는 국가로 강제 추방·송환하는 것을 금지하는 국제법상 규범이다.
특히 충분한 난민 심사와 인권 위험 평가 없이 추방이 이뤄질 경우 보호가 필요한 사람들이 결국 위험 국가로 우회 송환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녹색당 소속인 멜리사 카마라 유럽의회 의원은 “망명 신청자들의 기본권에 대한 역사적인 후퇴”라고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