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가 지난 1일 대만 타이베이의 한 식당에서 열린 한국 기업인들과의 만찬 행사 도중 취재진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세계 최대 인공지능 반도체 기업 엔비디아의 젠슨 황 최고경영자(CEO)가 국내 로보틱스 산업에 대한 투자 검토 소식을 알리면서 국내 로봇 산업계가 들썩이고 있다. 젠슨 황은 지난 1일 대만 타이베이에서 열린 ‘코리아 파트너 나이트’ 행사에서 “한국은 엔비디아 생태계의 매우 중요한 부분”이라며 “과학과 로보틱스, 인공지능(AI) 팩토리 분야에서 협력을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글로벌 인공지능 시장을 쥐고 흔드는 거물이 한국을 미래 로봇 산업의 핵심 동반자로 공인한 발언이라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2일 취재를 종합하면, 젠슨 황이 국내 로봇 산업에 주목하는 이유는 인공지능이 물리적 세계와 상호작용하는 ‘피지컬 AI’ 시대의 도래와 맞물려 있다. 두뇌에 해당하는 인공지능 소프트웨어가 아무리 발전해도 이를 현실에서 구현할 사지와 관절, 즉 완성도 높은 하드웨어 제조 능력이 없으면 무용지물이기 때문이다. 한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정밀 제조 기술력과 인프라를 갖추고 있어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이 매력을 느낄 수밖에 없는 구조다.
전문가들은 국내 로봇 산업의 가장 큰 경쟁력으로 ‘로봇 제작에 필요한 전방위 밸류체인을 자체적으로 보유했다’는 점을 꼽는다. 한 업계 관계자는 “로봇의 핵심 두뇌 역할을 할 고대역폭메모리(HBM) 반도체는 물론, 로봇의 구동 에너지를 책임질 배터리 기술력까지 세계 시장을 선도하고 있다는 것이 한국의 강점”이라며 “여기에 자동차와 전자기기 제조 과정에서 수십 년간 축적한 정밀 기계 제어 노하우가 로봇 공학 기술과 결합해 시너지를 내고 있다”고 말했다.
국내 주요 대기업들의 로봇 사업 대전환도 ‘K로보틱스’의 전망을 밝히고 있다. 과거 단순 반복 작업에 그치던 산업용 로봇 제조에서 벗어나 인간의 신체를 닮은 휴머노이드와 인공지능 기반 물류 로봇 시장으로 빠르게 체질 개선을 이뤄냈다. 실험실 수준의 기술을 산업 현장에 대량으로 양산해 공급할 수 있는 생산 역량을 갖춘 국가는 전 세계적으로도 극히 드물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분석이다.
이러한 협력 기조는 오는 5일 예정된 젠슨 황의 방한과 ‘성수동 삼겹살 회동’을 기점으로 더 구체화될 전망이다. 지난해 치킨집 회동에 이은 이번 2차 ‘깐부 회동’에는 구광모 LG그룹 회장뿐 아니라 박정원 두산그룹 회장도 참석해 로보틱스 동맹을 구상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시장에서는 AI 로봇 사업을 전면에 내세운 LG전자와 두산로보틱스의 주가가 나란히 상한가를 기록하며 격렬하게 반응했다.
실제 국내 주요 기업들은 엔비디아의 인프라를 활용해 피지컬 인공지능 생태계를 선점하기 위한 혈투를 벌이고 있다. LG전자는 엔비디아의 범용 휴머노이드 추론 모델인 ‘아이작 GR00T(그루트)’를 기반으로 자체 모델 개발과 핵심 부품인 액추에이터 양산 체제 구축에 나섰다. 두산로보틱스는 엔비디아와 협력해 내년 지능형 로봇 솔루션을 선보인 뒤 2028년 산업용 휴머노이드를 출시할 계획이라고 한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로봇의 학습과 추론 수요 폭발에 대응해 고성능 메모리 공급망을 책임지고, 독자적 로봇 친화 빌딩 기술을 축적한 네이버는 오는 8일 젠슨 황의 사옥 방문에 맞춰 구체적인 협력 방안을 공개한다.
엔비디아의 시선은 대기업을 넘어 국내 유망 스타트업으로도 향하고 있다. 비공개 만찬으로 진행된 이번 코리아 파트너 나이트 행사에는 국내 대기업 사장단뿐 아니라 한국의 로봇 스타트업 대표들이 대거 초청돼 젠슨 황 최고경영자와 직접 독대했다. 휴머노이드 로봇을 제어하는 로봇 파운데이션 모델 개발사 ‘리얼월드’의 류중희 대표를 비롯해 웨어러블 로봇 기업 ‘위로보틱스’, 로봇 자율주행 기술을 보유한 ‘디든로보틱스’ 등이 참여했다. 엔비디아 측은 이들 스타트업을 피지컬 인공지능 생태계의 핵심 협력사로 지목하고 실제 지분 투자를 적극 추진 중인 것으로 파악됐다.
시장에서도 이미 이런 K로보틱스의 가치를 재평가하기 시작했다. KB증권은 2일 보고서를 통해 현대모비스의 목표주가를 기존 75만원에서 120만원으로 60% 상향 조정하며 적정 시가총액을 111조원으로 제시했다. 현대모비스가 그룹사의 휴머노이드 로봇에 들어가는 핵심 관절 부품인 액추에이터 공급체계를 구축했다는 점이 반영된 결과다. 이는 전통 제조업 기반의 국내 기업들이 로봇 하드웨어 시장의 핵심 공급처로 변모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업계에서는 엔비디아를 비롯한 글로벌 테크 기업들과의 협력 본격화가 국내 로봇 산업의 패러다임을 바꿀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자율주행과 스마트 팩토리 공정에서 다져진 하드웨어 양산 능력에 글로벌 빅테크의 인공지능 파운데이션 모델이 이식되면 K로보틱스는 전 세계 피지컬 인공지능 공급망의 중심축으로 도약할 기회를 맞이하게 된다.
젠슨 황은 “한국은 훌륭한 생태계를 갖고 있고 기업들도 매우 뛰어나다”며 “엔비디아도 한국의 로보틱스 발전에 기여할 수 있길 바라며, 인공지능과 로봇이 한국의 잠재력을 극대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 특유의 탄탄한 정밀 제조 공급망과 대기업·스타트업의 시너지는 미래 로봇 대전환기 속에서 대체 불가능한 무기가 돼 글로벌 시장을 선도할 것으로 전망된다.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계기로 한국을 찾은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가 지난해 10월 30일 서울 삼성동 한 치킨집에서 진행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과 치맥 회동 중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