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에서의 승리보다 논공행상이 더 어려움을 보여주는 역사적 사례는 많다. ‘중진국 함정’과 ‘왜 국가는 실패하는가’ 역시 누가 얼마나 가질 것인가에 대한 시스템 오류와 관련된다. 공과가 어떻게 평가되고 누구에게 귀착되는가는 시스템 운영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 세상은 거칠고 위험한 방향으로 변하고 있다. 전쟁과 위협이 대화와 외교를 대신하고, 상호의존이 취약성으로 인식된다. 중소국가에 활동공간을 열어주던 ‘규범에 의한 국제질서’는 힘의 논리에 자리를 내주고 있다. 러·우 전쟁은 5년째 이어지고, 중동의 불안도 높다. 미·중 전략경쟁은 무역과 기술, 금융과 군사 전반으로 확대되고 있다. 자유무역과 글로벌 공급망이 평화를 보장해준다는 기대는 과거형이 되었다. 막혀 있는 호르무즈 해협을 보면서 믈라카 해협과 대만 해협을 떠올리는 것은 자연스럽다.
이런 시대에는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힘이 더 절실하다. 군사력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위기의 순간에는 재정 여력과 외환보유액, 금융시스템의 안정성이 ‘보이지 않는 무기’이다. 1997년 외환위기와 2008년 금융위기, 코로나, 이란전쟁을 거치면서 재정과 금융, 에너지의 비축분이 얼마나 중요한지 경험했다. 굴을 세 개 파두는 토끼의 지혜(狡免三窟)가 생존의 조건이 되고 있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반도체산업은 더욱 그렇다. 길든 짧든 업황 사이클이 작동한다. 기술 변화 속도도 매우 빠르다. 대규모 연구·개발 투자와 설비투자가 뒷받침돼야 한다. 인공지능(AI)이라는 기술 충격이 더해져 투자 규모가 더 커졌다. 글로벌 AI 슈퍼사이클이 반도체, 전력 인프라 등 하드웨어 특수로 연결되고 있지만, 기술과 지정학을 둘러싼 불확실성은 과거와 비교할 수 없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인구 고령화와 저성장의 늪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를 걱정했다. 반도체기업의 수익을 어떻게 나눌 것인가는 1년짜리 임금협상의 문제가 아니다. 현재의 소비와 지출, 미래를 위한 예비·투자 사이에 어떤 배분이 필요한지에 대한 문제이다. 노동자의 기여는 분명하다. 엔지니어가 부자가 되는 것도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이 다는 아니다. 마이클 샌델의 정의관으로 보면 인간의 성취에는 시대적 운이나 사회적 조건이 크게 작용한다. 누구든 “내가 성공했으니 다 나의 것이다”라고 주장한다면 오만한 능력주의로 비친다.
대중의 정서가 정치를 움직이고 결국 정책을 좌우하게 됨을 유의해야 한다. 이미 많이 가진 집단의 과도한 이익 추구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게 된다. 이해관계자 자본주의하에서 기업 성과 중 얼마가 노동자의 것인지는 넓은 합의가 필요하다. 대규모 투자가 필수인 업종의 경우 영업이익은 경영성과의 지표로 부족할 수 있다. 자본 투입의 비용과 규모를 감안하는 경제적 부가가치(EVA)와 잉여현금흐름(CFC)도 함께 보아야 한다.
공정과 형평의 잣대는 단순하지 않다. 지금의 성과가 현직자들만의 것은 아니다. 수십년간 축적된 투자, 연구·개발, 협력업체 생태계, 국가 인프라, 교육시스템 등이 함께 작동한 결과다. 현대전자 시절부터 청춘을 바쳐 하이닉스를 지켜냈다고 생각하는 최근 퇴직자는 어떤 심정일까. 미래세대의 일자리와 기회는 누가 챙기나.
한국 사회는 성과 배분을 둘러싸고 더 민감해지고 있다. 성장률은 낮아지고, 청년들은 미래에 대한 불안을 느낀다. 중산층도 안정감을 잃고 있다. 이번 ‘삼전닉스’(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성과급 논란은 AI 혁명 초기 단계에 불안정한 세계질서 속에서 우리가 어떤 원칙으로 부를 만들고, 나누고, 미래를 준비할 것인가를 숙의하는 시발점일 수 있다. 기존 사회안전망,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 보편 기본소득(UBI), 국부펀드, 석유·가스기금 사례 외에도 AI기업 지분을 시민에게 나눠주자는 미국 내 주장(트럼프 계정)까지 다양한 논의가 있다. 초과세수의 약 40%를 기계적으로 배분받는 지자체와 교육청 예산의 낭비 요인을 억제하는 것도 중요하다.
많이 버는 것에서 과제가 끝나지 않는다. 관리되지 않는 로또형 부는 독이 된다. 과거-현재-미래는 순환한다. AI 혁명, 세계질서 변화, K컬처가 재도약의 기회를 주고 있다. 하지만, 당장의 내 이익을 극대화하려고 다투고 분열하는 기업과 국가에 남아 있을 기회는 없다. 제로섬이 강해지는 국제질서하에서 우리 내부에 제로섬의 이익 추구가 작동하면 외부 압력에 취약해진다. 예상외의 성과를 위기의 씨앗으로 만들 수는 없지 않은가. 세계가 한국의 선택을 주시하고 있다.
이호승 전 대통령비서실 정책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