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미술책 하나를 샀다. 도서관에서 빌려 본 책인데 기대 이상으로 흥미로운 책이라 아예 옆에 두고 싶어서 구입했다. 제목은 <미술관에 스파이가 있다>. 작가 비앙카 보스커가 뉴욕 현대 미술계 이곳저곳에 잠입 취업해 마치 스파이처럼 활동하며 쓴 예술 에세이다.
스파이에게는 완수해야만 하는 임무라는 게 있다. 비앙카가 ‘환영받지 못할 첩자’ 신분으로 스스로를 미술계의 밑바닥에 밀어넣으며 부여한 임무는 바로 “도대체 예술이 뭐길래 삶의 벼랑 끝에서도 인간이 그것으로 희망의 빛을 구하는가?”에 대한 답을 찾아오는 것이었다.
그 임무에 영감을 준 이는 그녀의 할머니였다. 홀로코스트 생존자였던 할머니는 화가는 아니었지만 난민수용소에서도 아이들에게 그림을 그리게 했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이민자로 빠듯한 삶을 살면서도 미술을 사치스러운 취미가 아닌 ‘삶의 일부’로 사랑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은퇴 후 여든 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직접 붓을 들고 그림 그리는 삶을 시작했다.
그리고 훗날 그 할머니의 손녀가 ‘뉴욕타임스’ 저널리스트가 되어 시골집 다락방에서 할머니의 유산이라고 할 수 있는 ‘춤추는 당근 그림’을 발견한다. 그 ‘당근’이 손녀에게 묻는다. “이건 네가 꿈꾸던 삶이니? 혹시 네가 꿈꾸던 미래보다 훨씬 더 지루하고 칙칙한 거 아니야?”
저자는 그 순간 자신의 예술적 소명을 깨닫는다. 도대체 예술이 뭐길래, 우리 할머니처럼 평범한 분이 겨우 생존하기도 벅찬 순간에도 예술을 자기 삶을 위한 필수적인 것으로 쥐고 있었던 걸까? 그 물음에 진실되게 답하기.
그리하여 5년간 갤러리 조수와 구겐하임 미술관 경비원 등으로 위장 취업한 스파이가 보고해온 미술계의 실체는 지독했다. 대중을 소외시키기 위해 작품 가격을 숨기고, 미술을 어렵게 만들기 위해 난해한 설명서 장벽을 치는 ‘전략적 속물근성’을 사용한다는 점. 더 충격적인 것은 미술을 감상하고 평가하는 기준 그 자체였다. 컬렉터나 전문가들은 작품의 아름다움이나 가치보다 그 작품을 둘러싼 맥락에만 집착했다. “이 작가의 배경은 어떠한가?” “누가 이 작품을 소유하고 있는가?” 같은 질문들이다. 정작 작품 자체를 바라보는 시선은 거세되어 있는 괴이한 세계였다.
그러나 이 스파이의 최종 보고서가 매혹적인 이유는, 미술계의 이토록 아름답지 않은 민낯을 폭로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가장 정직하고 가장 쓸모 있게 삶을 위한 예술 향유법을 되돌려준다는 점이다.
그 방법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는 묘비명 같은 난해한 해설문을 무시하고 내 눈으로, 내 경험으로 그림을 읽으라는 것. 두 번째는 칫솔이나 비누, 구름 등 일상의 소소한 것을 예술가의 눈으로 보라는 것. 무엇보다 세 번째가 중요한데 그건 ‘예술은 궁극적으로 훨씬 더 아름답게 살겠다’는 주체적인 ‘결단’이며 ‘선택’이고 ‘안일에 대한 투쟁’이며, 더 좋은 삶을 위한 ‘연습’이라는 점을 인식하고 실천하라는 것이다. “나의 옥탑방으로 가는 저 우중충한 계단을 개선해보겠어. 최선을 다해, 아름답게. 내 첫 번째 작품이다 생각하고.” 예컨대 이것은 나의 고백이다. 보다 예술적인 선택과 결심으로 장기 불황에 흔들거리는 내 삶을 개조하겠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