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위암으로 세상 떠나
미발표작 등 시 42편·산문 3편 수록
허수경 시인. 경향신문 자료사진
“우리 모두는 다만 기어이 가야 할 곳으로 떠난다// … 사랑하는 사람아, 당신을 기다리면서 물들면서/ 나는 이 세상 속, 어떤 예쁜 사람이 되어 사라져간다”(‘공항에서’ 중)
2018년 세상을 떠난 허수경 시인의 유고 시집이 나왔다. 42편의 시와 3편의 산문이 실린 <만일 그대가 나보다 먼저 간다면>(난다)이다. 시인은 생전 위암 말기 진단을 받고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자신의 작품을 노트북 등에 정리해 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시인과 절친한 사이였던 김민정 시인이 허 시인으로부터 이 노트북을 전달받았고, 여기에 있던 작품을 모아 엮었다.
“만일 그대가 나보다 먼저 간다면/ 아직 뭔가를 쓸 수 있는 구십이라는 나이가 나에게 있다면/ 나는 그대의 무엇을 가장 마지막까지 쓸까/ 어느 순간에는 영원 같은 어긋남의 빛이 있어/ 그림들 속에 숨겨진 웃음과 울음은 서로 안아주었다고/ 헐거운 노래를 허밍하며 이 정거장에서 저 정거장으로/ 우리는 우리의 심장을 보낸 적도 있었다고”(‘만일 그대가 나보다 먼저 간다면’ 중)
시집에는 생의 흐름과 시간을 사유하는 서정적 느낌의 시가 다수 실렸다. ‘박하의 나날’, ‘그녀가 들려주는 시’ 등 그간 어떤 지면에서도 소개된 적 없던 미발표작도 여럿 담겼다.
“그녀의 시를 들으면 다시 슬퍼져 도통 바깥으로 나가지 못할 것 같아 그녀의 얼굴을 그려보려고 하나 떠오르지 않고 그 얼굴을 블루스, 소울, 가스펠, 시나위일까 울 밑에서 잠든 바다일까 결국 그녀는 겨우 크리스마스 캐럴을 부르며 매년 돌아오는 집 나간 어머니인가”(‘그녀가 들려주는 시’ 중)
허 시인이 세상을 떠난 지 약 8년, 유고시집이 이제야 나온 이유가 있다. 김 시인은 경향신문과 통화에서 “세상을 떠난 사람의 노트북을 열어 본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빨리 정리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도 있어 (유고 시집 정리를) 미뤄왔다”며 “그런데 지난해 11월 허 시인의 유족들을 만난 자리에서 아직 허 시인의 사망 신고가 안 됐다는 얘기를 들었다. 독일에 있는 남편이 투병 중이라 한국에서 서류 정리를 못 하고 있는 것이 이유였다. 허 시인이 아직까지 (서류상으로는) 살아 있는 사람이라는 얘기를 들으니 이제는 쉬게 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를 위해 생일인 6월 9일에 맞춰 유고시집을 냈고, 올해 허 시인의 기일 전에는 사망 신고 문제도 해결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유고 시집 출간을 맞아 시인들이 추모의 글을 보내기도 했다. 김혜순은 “여성성으로의 연대를 새로 시작하기 위해, 오직 당신만의 이야기를 위해, 살아서 죽음을 추억하기 위해, 떠남으로 돌아오기 위해, 떠나고 돌아오고 다시 떠나고 바리공주처럼.”이라고, 함민복은 “그대마저 삼켜버릴 듯 쓸쓸하던 그대의 노래들. 잘 가라 노래를 발굴하다가 노래가 된 한 방울 눈물아.”이라고 했다.
시집 출간을 기념해 오는 9일에는 서울 종로구의 시집 서점 위트앤시니컬에서 이번 시집을 릴레이로 필사하고 완독하는 행사도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