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들어 최악의 선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의 투표용지 부족 사태 여파가 좀처럼 가라앉지 않고 있다. 서울 송파구를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 유권자들이 선거권을 온전히 행사하지 못한 데 이어, 불신과 의혹의 목소리가 또 다른 광장을 채우고 있다. 심지어 점차 가라앉을 줄 알았던 부정선거 음모론까지 버젓이 고개를 들고 있다. 새롭게 당선된 후보들이 비전을 제시하고 시민들이 미래를 기대해야 할 시기에, 온 국민은 분노와 무력감 사이 어딘가에서 지쳐가고 있다.
시민들이 기초적인 관리 업무조차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선거관리위원회를 규탄하는 건 당연하다. 지난해 12·3 내란 당시 여의도 집회 인증 사진으로 가득했던 개인 SNS에, 이번에는 송파구 개표소 앞 시위 현장을 담은 게시물이 적지 않게 올라오고 있다. 의사 표현 방식에 대한 평가는 차치하고, 그 분노 자체가 정당하다는 점은 놓쳐서는 안 된다.
현장에는 ‘부정선거’나 ‘중국 선관위’와 같은 극우적 구호를 내건 피켓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시민으로서 책임감을 가지고 문제를 제기하고 싶지만, 마땅한 통로를 찾지 못해 그 공간으로 향한 이들 역시 존재한다. “음모론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목소리는 내야겠다”는 참여자들의 글을 보고 있으면, 과거 보수정권의 부패와 무능에 맞서 거리로 나섰던 시민들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도 든다. 경찰의 연행도 기본권의 침해도 그들에겐 처음 보는 세계라는 사실이 마냥 긍정적일 수는 없지만, 그래도 구조적 모순에 저항한 것이 어디인가 싶기도 하다.
오히려 문제는 시민들의 분노에 대응하는 위태로운 정치의 모습이다. 계엄을 옹호해온 국민의힘 일부 정치인들은 음모론을 자극하며 상황을 악화시키고 있다. 정부와 여당 역시 독립기구로서 직접 개입이 불가한 선관위의 위치와 여러 정치적 부담 때문인지 미온적이고 늦은 대응을 보이며 커져가는 불신을 적절히 수습하지 못했다. 그 결과 참정권 침해에 대한 진상규명도, 재발방지 대책도, 구조적 개선 논의도 제대로 이뤄지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누군가는 과도한 음모론으로, 누군가는 회피로, 누군가는 조롱으로, 문제 해결보다는 진영 간 적대감만 키우고 말았다.
사실 이번 사태는 원인도 결과도 비교적 분명하다. 총체적인 부실을 드러낸 선관위에 신속하고 분명하게 책임을 물으면 된다. 분노하는 시민들의 행동은 존중받아야 한다. 그리고 그 분노를 진영의 이해관계나 정치적 계산에 이용하려는 시도와는 거리를 두어야 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시민들의 판단을 탓하기보다 더 많은 이들이 음모론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고 민주주의에 대한 신뢰를 더 잃지 않도록 책임 있게 대응하는 일이다.
이번 지방선거가 끝나면 서울시장 선거 등에서 내건 밋밋하거나 허황된 공약들을 비판하려 했다. 그러나 지금은 정책 경쟁 이전에 계엄의 명분이었던 음모론이 다시 정치의 중심으로 스며드는 현실이 되어버렸다. 정부와 여당에 지금 가장 중요한 과제는 국민들 사이의 갈등을 최소화하고 신뢰를 회복하는 일이다. 자정 능력을 상실한 선관위를 근본적으로 개혁하기 위해 국정조사를 비롯해 국회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역할을 해내야 하고, 정부 역시 보다 책임 있는 조치와 메시지를 내놓아야 한다. 이번 사태를 제대로 수습하지 못한다면, 다음 선거는 물론 민주주의 체제를 향한 더 크고 거센 음모론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이한솔 한국사회주택협회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