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백룸>의 ‘클락’(추이텔 에지오포)이 자신이 운영하는 가구점 지하에서 발견한 미지의 공간 안을 헤매고 있다. 바이포엠스튜디오 제공
유튜브에서 경력을 시작한 만 20세 감독의 공포 영화 <백룸>(케인 파슨스 감독)이 개봉 1주 차인 지난주(5월29일~6월4일) 북미 박스오피스 1위에 올랐다. 한국에서도 <백룸>은 개봉 11일째인 지난 6일 누적 관객수 70만 명을 넘어섰다. Z세대의 호응이 Z세대 감독이 만든 영화의 인기를 견인하고 있다.
‘백룸’은 2019년 해외 온라인 커뮤니티 ‘4chan’에 올라온 사진 한 장에서 시작된 괴담 세계관이다. 노란 벽이 늘어선 텅 빈 건물을 찍은 사진 한 장이 ‘기이하게 기분이 나쁘다’며 관심을 끌었다. 이 사진에 설정을 덧붙이는 게 놀이가 됐다.
가상현실이 익숙한 Z세대는 사진에 게임적 상상력을 접목했다. 게임에서 오류가 나서 진입하지 못해야 하는 공간을 넘어 지도 밖으로 튕겨 나가는 것을 ‘노클립’이라고 한다. 제작자가 의도하지 않은 공간에 떨어진 만큼 지형과 사물이 뒤틀려 보이게 되는데, 문제의 사진이 마치 그처럼 현실감이 없어 보인다는 게 설정의 골자가 됐다. 현실과 다른 ‘층’에 떨어진 사람들이 뒤틀린 공간에 갇혀 헤매고 쫓기는 얘기들이 파생됐다. 댓글에서 설정집으로, 또 영상으로 2차 창작물이 생겨났다.
케인 파슨스는 2022년부터 유튜브 채널 ‘Kane Pixels’(케인 픽셀스)에 백룸 2차 창작 영상을 올렸다. 유튜브 갈무리
<백룸>을 연출한 케인 파슨스 감독. 바이포엠스튜디오 제공
<백룸>의 감독 케인 파슨스(21)는 2차 창작 활성화에 불을 댕긴 유튜버였다. 17세이던 그가 2022년 자신의 채널에 비디오테이프(VHS) 질감으로 올린 ‘백룸(파운드 푸티지)’ 영상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파슨스는 조회수 8343만회(7일 기준)에 달하는 첫 영상에 이어 관련 영상 20여 개를 올렸다. 그는 독학으로 영상 편집 도구인 애프터이펙트와 3D 모델링 도구인 블렌더를 익혔다고 한다.
<미드소마> <유전> 등 독창적인 공포물을 선보여 온 A24가 파슨스에게 영화화를 제안했다. 파슨스는 A24와 계약한 최연소 감독이다.
<백룸>의 심리 상담사 ‘메리’(레나테 레인스베). 바이포엠스튜디오 제공
영화 <백룸>에는 A24와 파슨스 둘 모두의 인장이 진하게 박혀 있다. 아내와 이혼하고 장사 안 되는 가구점에서 우울한 날을 보내고 있는 ‘클락’(추이텔 에지오포)이 주인공이다. 그는 가구점 지하의 벽 너머에서 이상 공간을 발견하고는 곧 매료된다. 심리 상담가 ‘메리’(레나테 레인스베)에게 흥분해 이 사실을 이야기하지만, 믿지 않는 눈치다. 클락은 “증거를 가져오겠다”며 떠난다.
작가 윌 수딕이 각본을 쓰고, 파슨스가 이야기의 흐름을 함께 다듬었다. 초반부는 A24 특유의 예술 영화적인 연출에 심리를 옥죄어가는 듯한 분위기로 전개된다. <노예 12년>의 에지오포와 <센티멘탈 밸류>의 레인스베의 호연이 영화를 ‘잘 만든 독립영화’로 보이게 한다.
인물들이 ‘백룸’에 진입하면서부터는 세계관에 대한 파슨스의 진심이 보인다. 무더기로 놓인 소파, 끝이 보이지 않는 경사로, 기괴하게 늘어선 집…. 인공지능(AI)이 공간을 무한 생성하다가 오류를 일으킨 듯한 공간이지만, AI를 활용하는 대신 2800㎡ 규모의 스튜디오에 실제 세트를 만들었다. 파슨스는 CBS 인터뷰에서 “AI로 만들었다고 하면 ‘임의로’ 만들어진 세계라는 생각에 세부사항에 관한 관심이 확 사라지더라”고 이유를 밝혔다.
영화 <백룸>의 ‘클락’(추이텔 에지오포)이 자신이 운영하는 가구점 지하에서 발견한 미지의 공간 안을 헤매고 있다. 바이포엠스튜디오 제공
박스오피스모조에 따르면 <백룸>은 북미에서 개봉 6일 만에 1억달러(약 1550억원) 이상을 벌어들이며 북미 기준 A24 최대 흥행작이 됐다. 전 세계 흥행 기록도 곧 따라잡을 것으로 전망된다. 제작비 1000만달러(약 156억원)의 저예산으로 거둔 성과다. 개봉 첫 주에는 제작비 1억6500만달러(약 2574억원)에 달하는 <스타워즈: 만달로리안과 그로구>를 제치고 북미 박스오피스 1위에 올랐다.
영화 <백룸>의 ‘메리’(레나테 레인스베)가 ‘클락’(추이텔 에지오포)을 찾아 온 가구점 지하에서 영문을 알 수 없는 네모 표시 앞에 멈춰 서있다. 바이포엠스튜디오 제공
미 연예매체 데드라인에 따르면 개봉 초반 <백룸>을 관람한 북미 관객의 88%가 ‘35세 이하’(18~24세 43%, 25~34세 25%, 13~17세 20%)였다. 백룸 세계관이 익숙한 세대이기도 하거니와, ‘힙한’ 장르 영화의 명가가 된 A24의 팬덤과 파슨스의 팬덤이 모두 젊은 층에 분포한 영향이다.
할리우드는 ‘유튜브 세대 감독’의 등장을 눈여겨보고 있다. 유튜버 커리 바커(26)의 초저예산 공포 영화 <옵세션> 또한 <백룸>과 같은 시기 박스오피스 2위에 올랐다. A24는 바커 감독에게 발 빠르게 고전 공포 영화인 <텍사스 전기톱 학살>의 리메이크를 제안했다.
뉴욕타임스는 “1990년대 데이비드 핀처, 스파이크 존즈 등 MTV에서 뮤직비디오 연출하던 감독이 영화감독의 새 시대를 열었던 것”에 유튜버 출신 감독들의 등장을 견주어 봤다. ‘청년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아는 젊은 감각의 매체가 신진 감독 등장의 발판이 되었다는 점에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