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일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개표소 재선거 요구 시위 현장에 모인 참가자들이 태극기를 들고 있다. 박민규 기자
6·3 지방선거 투표용지 부족 사태로 촉발된 잠실 투·개표소 봉쇄 시위의 주축인 2030 청년층이 주목받고 있다. 이들은 최초 시위를 주도했던 극우세력과 선을 긋고, ‘재선거’ 및 ‘참정권 보장’을 전면에 내세워 여론과 시위를 주도하고 있다. 2030의 이러한 ‘정치적 거리 두기’가 보수 성향 시위의 새로운 ‘분화’내지는 ‘다층화’로 이어지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8일 경향신문 취재를 종합하면 이날까지 나흘째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에서 이어진 재선거 요구 시위에는 2030이 주축으로 참여하고 있다. 이들 중 상당수는 특정 정치 세력의 주장을 배척하고 집회의 순수성을 강조했다.
시위 현장에는 “재선거, 참정권 침해만 외쳐달라” “태극기만 흔들어달라” 등 문구가 적힌 대자보가 곳곳에 붙었다. ‘스톱 더 스틸’ 등 부정선거론 구호를 제지하는 참가자들도 눈에 띄었다. ‘재선거’를 내세우는 이들과 ‘부정선거’ 주장파가 충돌하며 긴장감이 높아지는 상황도 벌어졌다.
현장에서 만난 다수 2030 참가자들 주장은 “특정 정당을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헌법상 권리인 참정권을 침해당한 것에 대한 분노”로 요약된다. 정치적 이념과 무관하게 민주주의의 토대가 되는 선거의 핵심이자 헌법상 가치인 참정권이 침해받았다는 문제의식이 깔려있는 것이다.
이들은 시위가 순수하고 자발적이라는 점도 강조했다.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것을 강하게 경계하는 차원에서 참가자들을 ‘시위대’로 부르는 데에도 불쾌해하는 모습을 보였다.
A씨(25)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투표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한 참정권이 훼손됐다”며 “전세계가 수많은 피를 흘리며 이를 지켰는데, 이게 침해된거라 정치 여야 상관없이 무조건 나와야한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B씨(27)는 “참정권을 훼손당하고 박탈당한 시민들이 분노해서 자발적으로 모인 ‘잠실 민주화 운동’”이라며 “그렇기 때문에 재선거나 참정권 회복 외 다른 정치적 구호는 외치지 말자는 분위기가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개표소 봉쇄 시위 참가자들이 지난 7일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개표소 시위 현장에 ‘재선거’ 구호만 외쳐달라는 내용 등이 적힌 자보를 적어 붙여뒀다. 김태욱 기자
투표용지 부족 사태 직후부터 대학가에서도 비슷한 흐름이 광범위하게 나타났다. 전국 수십개 대학에서는 참정권과 민주주의 가치를 강조한 규탄 성명문이 잇따랐다. “선거관리위원회의 직무유기로 민주주의가 유린당하는 것을 방관할 수 없다”(이화여대) “선거권은 헌법이 보장하는 참정권의 핵심”(서울대) 등이다.
전날 김민석 국무총리와 전·현직 총학생회 대표들이 만난 자리에서 지태훈 경기대 총학생회장은 “학생들은 특정 정당이 아닌 민주주의 편에 서고 싶다”며 “학생들의 요구는 진상 규명, 책임 규명, 재발 방지라는 세 가지로 요약된다. 본질적 문제 제기 마저 정치적 논쟁에 묻히고 있다”는 우려를 전하기도 했다.
서울대에선 투표용지 부족 사태를 계기로 극우 성향 단체와 이에 반대하는 학생들이 맞붙었다. 서울대 학생들은 극우 성향 청년단체 ‘트루스포럼’이 이날 오후 6시 재선거를 요구하는 시국선언을 예고하자 항의에 나섰다. 이들은 대자보를 통해 “선거 관리 부실과 부정선거는 구별해야 한다”며 “트루스포럼은 이번 사태를 계기로 부정선거 음모론을 확산 시켜 윤석열 전 대통령의 계엄이 정당했음을 주장하려는 것”이라고 밝혔다. 선관위에 책임을 물어야 하지만 부정선거 음모론 확산은 경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개표소 시위 현장뿐 아니라 대학가에서 계속 이어지는 양상이다.
서울대 단과대학생회장연석회의가 지난 5일 발표한 투표 용지 부족 사태 관련 선거관리위원회 규탄 입장문. 서울대 단과대학생회장연석회의 인스타그램 갈무리
전문가들은 참정권 침해에 분노한 보수 성향 청년층이 정치 색채에 거리 두기를 꾀하면서 최근 시위 현장이 ‘극우 시위’에서 분화하는 특징이 두드러진다고 짚었다. 전상진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는 “그동안 시민사회 공론장에는 이른바 극우 우파만 남았었다”며 “목소리가 표출되지도, 대변되지도 못했던 보수 우파에 속하는 이들이 (이번 사태를 계기로) 발화 기회와 통로를 찾은 셈”이라고 말했다.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명예교수는 “국가기관과 기득권 집단 전반에 대한 불만이 2030을 중심으로 보수적 형태로 표현되는 것”이라며 “극우 집단으로 표현되는 이들과는 분명히 차별화된 움직임이 나타나는 양상”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