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정치와 보편 종교가 상극인 것은,
비우려는 의지와 채우려는 열망이 상충하는 까닭이다.
담론의 문법 또한 상극이다
비타협적 신앙의 문법이 정치 영역으로 넘어오면
대화 불통의 독선이 된다.
전체주의는 모든 존재들을 이념과 신앙의 도구로 만든다
한국 기독교가 선을 넘는 것은 심각한 일이다.
민주정치 영역에 난입한 신앙의 문법은,
시장을 난장판 만드는 미친 코끼리에 다름 아니다
1.
최고 권력의 자리를 비워놓고자 하는 의지는 민주주의의 본질적 특성이다. 프랑스 정치학자 클로드 르포르의 말이다. 왜 그러한가. 특정 인물이나 정당이 권력을 영속적으로 차지하면 독재와 전체주의가 출현한다. 전제군주제에서는 국가 권력이 개인의 소유물이 되고, 진리의 영원성이 국가 권력의 지배자가 되면 신정정치가 된다. 이들은 모두 민주주의의 반대항들이다. 권력을 영속화하려는 힘을 제어함으로써 성립하는 민주주의는 필연적으로 세력 간 알력과 적대를 동반한다. 그 불안정성을 감당할 수 있어야 민주주의가 유지된다.
종교 일반의 원리는 민주주의 정치와 정반대의 속성을 지닌다. 사람들이 지닌 존재론적 불안을 진정시킬 단단한 진리의 자리를 확보해야 종교는 성립할 수 있다. 불안한 마음을 어루만질 온화와 평정은 필수적이다. 보편적이고 영원하며 변치 않는 대답이라야 종교적 진리의 자리에 들어설 수 있다. 잠정적이고 수정 가능한 민주정치의 해결책과는 정반대이다. 절대성의 자리에 관한 한, 민주주의는 비우려 하고 종교는 채우려 한다. 채워지면 불안한 것이 민주정치 권력의 자리이고, 비어 있으면 불안한 것이 종교적 진리의 자리이다.
국가 공동체와 신앙 공동체의 원리적 차이 역시 분명하다. 국가 공동체는 국민 전체의 이익을 지향하며 이를 위해 타협과 조정이 필수적이다. 반면 신앙 공동체는 개개인의 이해관계와 무관한 진리를 자기 핵심으로 지닌다. 이익을 위해 신념을 양보하는 순간 신앙 공동체의 존재 의미가 사라진다. 일찍이 기독교의 절대자는 말한 적이 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
2.
민주주의는 구조적 불안정성으로 인해 종종 위험에 빠지곤 한다. 안정성 없음이 문제가 아니라, 불안정성을 못 견디는 것이 문제이다. 안정을 위해 이견을 없애려 하면, 사라지는 것은 이견이 아니라 민주주의 자체이다. 고되더라도 이견과 적대를 자기 안에 품고 가야 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존재 조건이다.
이상적 공동체를 바라는 사람의 눈에 민주주의는 기껏해야 차선의 제도로 보일 수밖에 없다. 보통선거제야말로 민주주의의 특성을 드러내는 증상적인 것이다. 중요한 선거일수록 도를 넘어서는 비방과 흑색선전이 등장한다. 저런 게 통할까 싶은데 심지어 그것이 통한다. 민주 선거의 유권자 대중은 자기 자신과 공동체의 미래를 생각하며 진지하게 판단할까. 예를 들기 위해 멀리 갈 것도 없다. 손에 부적을 써서 TV 토론에 나온 노골적 샤머니즘의 화신을 우리 공동체는 대통령으로 선택한 적이 있다. 그 이전에는 그보다 더한 선택도 했었다.
그럼에도 보통선거제 외에 다른 대안이 없다는 것이 문제이다. 1987년, 첫 번째 대통령 직선제 선거 결과가 나온 후, 처참한 심정으로 친구들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때 우리는 투표함을 지키기 위해, 참관인 자격으로 트럭을 타고 산골에 들어간 20대 청년들이었다. ‘고무신 투표’를 하는 생각 없는 사람들까지 같은 유권자로 인정해야 되느냐는 개탄의 말은, 투표 자격시험이 있어야 한다는 냉소를 거쳐, 시험 성적에 따라 투표권을 차등 배분해야 한다는 절망적 농담들로 이어졌다. 그래서 대체 어쩌자는 것인가. 보통선거제를 부정하는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부정과 다르지 않다.
투표 결과는 공동체가 지니는 전체의지의 표현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전체의지라고 반드시 옳을 수는 없다. 개인이 시행착오를 통해 배우듯이, 전체의지도 시행착오를 통해 성숙해진다. 두 차례의 대통령 탄핵은 한국 민주주의의 엄청난 자산으로 축적되어 있다. 사후적인 관점에서 말하자면 차선이 오히려 최선일 수 있다. 곧바로 획득한 정답보다, 뼈저린 실패와 오답을 통해 도달한 해답이 월등한 가치를 지닌 것일 수 있다. 무엇보다 한국 민주주의의 역사가 그것을 보여준다.
3.
종교를 추동하는 원동력은 사람들이 지니는 존재론적 불안이다. 어느 날 문득 허망함이 찾아온다. 죽음의 시선으로 자기 삶을 보는 경험이다. 경건에 대한 갈망이 생겨나기도 하고, 더러는 초자연적 신비 체험에 휩싸이기도 한다. 내 앞에 있는 세상이 전부가 아님을 깨닫게 된다.
여기에 보편 종교가 지닌 비합리적 교리의 역설이 더해진다. 모든 보편 종교의 교리는 신비와 기적에 입각한 비합리적 서사를 핵심으로 품고 있다. 너는 믿느냐. 입교 절차에는 어김없이 심문 절차가 들어간다. 윤회의 세계와 해탈의 묘리를, 절대자가 죽음에서 부활했다는 것을 너는 믿느냐. 쉽게 믿을 수 있는 것이라면 이런 질문을 해야 할 이유가 없다. 믿을 수 없는 것을 믿는 것이 진짜 믿음이다. 키르케고르의 말처럼, 합리적이어서 믿는다면 그것은 자기 이성과 판단에 대한 믿음에 불과하다. 교리의 비합리성이 신앙의 요체라 함은 그런 까닭이다. 견결한 믿음은 비합리성 진창에서 솟아난다.
그래서 회의와 번민은 참다운 믿음의 동력이 된다. 미망의 어둠이 없다면 진정한 진리도 있을 수 없다. 신앙인으로 존경받는 존재들은 어김없이 자기 안에 있던 회의의 순간에 대해 말한다. 내면의 어둠이 자랑스러운 것일 수는 없다. 마더 테레사가 자기가 보냈던 어둠과 공허의 편지들을 없애달라고 했던 것은 그런 까닭이겠다. 그렇다고 자기 안의 어둠이 부끄러운 것일 수도 없다. 그곳을 거쳐야 제대로 된 신앙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진정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신앙의 자기 확신을 함부로 노출하는 것이다. 믿음을 과시하는 신앙인들의 태도에서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것은 몽매함과 위선, 독선과 교만이다. 우리 모두가 절대성의 임재를 간구하고 마음의 평화를 바라는 모자라고 미약한 존재들임을 그들은 잊고 있다.
한때 기독교도들이 사회적 존경을 받던 때도 있었다. 말이나 교리가 아니라 그들의 행동 때문이었다. 교회에 나가면서부터 술 담배를 끊고 바른 생활을 하게 되었다고 말씀하시던, 중학교 때 선생님이 계셨다. 학생들을 사랑으로 대하는 훌륭한 교사였다. 기독교와 연이 없던 나를 교회로 이끌었던 것은, 그분의 말이 아니라 온몸으로 발산하던 순정한 기쁨과 선량한 인품이었다. 그 시절 내가 알게 된 교회 사람들은 경건하고 지적이며 신실해 보였다. 그들과 한 공동체에 속하는 것만으로 마음이 버젓할 수 있었다.
지난 반세기 현저하게 성장한 한국 기독교는 명백하게 배타적 기복종교가 되어가고 있다. 기복종교가 되는 것만으로도 부끄러운 일인데, 배타적이고 독선적이라면 사랑의 절대자가 기함할 일이다. 은총과 영광을 원하는 사람은 교회가 아니라 무당집으로 가야 마땅하다. 자기 자신과 가족의 복을 비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부끄러운 것은 어디에서 누구에게 그것을 빌었냐이다. 배타적 기복을 위해 교회에 가는 것은 종교의 운명에도 치명적이다. 당신이 숭앙하는 절대자를, 잡귀를 물리치고 자기 집에 복을 가져다줄 힘센 귀신으로 만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4.
민주주의 정치와 보편 종교가 본성상 상극인 것은, 비우려는 의지와 채우려는 열망이 상충하는 까닭이다. 담론의 문법 또한 상극이다. 민주주의는 토론과 타협의 장이지만, 신앙에 이단과의 타협은 있을 수 없다. 둘의 결합이 카오스를 낳는 것은 당연하다.
비타협적 신앙의 문법이 정치의 영역으로 넘어오면 대화 불통의 독선이 된다. 소통 없는 신념과 독선의 광기가 권력을 얻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파시즘과 볼셰비키의 역사가 보여준다. 전체주의는 모든 존재들을 이념과 신앙의 도구로 만든다.
몸집이 커진 한국 기독교가 선을 넘는 것은 심각한 일이다. 민주정치의 장으로 들어오려면 종교인이 아니라 시민의 언어를 익혀야 한다. 민주정치의 영역에 난입한 신앙의 문법은, 시장을 난장판으로 만드는 미친 코끼리와 다름없다.
증오와 배타의 교설은 적그리스도의 것임을 기독교의 역사가 증언한다. 신앙의 어둠과 회의 속에서 마더 테레사를 버티게 해준 것은 스스로에게 부과한 믿음의 사역 행위였다. 기독교가 인류에 기여한 최고의 복음, 사랑의 율법이 그 핵심에 있음은 강조할 필요가 없겠다.
문학평론가. 서울대학교 아시아 언어문명학부 및 비교문학 협동과정 교수로 재직 중이다. 1994년 계간 ‘문학동네’를 창간하여 2015년까지 편집위원으로 활동했다. 한신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를 지냈다. 한국 문학과 세계 문학, 인문학에 관한 글을 쓴다. <동아시아 비교문학> <우정의 정원> <왜 읽는가> <풍경이 온다> <죄의식과 부끄러움> <인문학 개념정원> <미메시스의 힘> <아첨의 영웅주의> <문학의 윤리> <사랑의 문법> <소설의 운명> 등의 책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