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가 지나간 자리는 황량하기만 하다. 전쟁의 황폐감과 축제가 끝난 허탈감이 공존하기 때문이다. 표를 준 사람의 당락과 무관하게 유권자들은 지방정부들에 필요한 4년치의 지지를 미리 선불해버렸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그런 의미에서 선거라는 제도의 놀라움은 누구나 불만족스러움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선거를 치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아닌가 생각한다.
미국의 정치학자 아담 셰보르스키는 이 점을 더욱 냉정하게 표현했다. 민주주의란 어떤 정당과 후보든 “선거에서 질 수 있는 체제”이며, 선거란 갈등을 제거하는 제도가 아니라 갈등을 평화적으로 관리하는 제도라고 말이다. 민주주의가 위대한 이유는 모두가 만족스럽기 때문이 아니라, 패배한 사람들조차 다음 선거를 기다리게 만들기 때문이다. 오늘의 패자가 내일의 승자가 될 수 있다는 믿음, 그리고 오늘의 승자 역시 언젠가는 심판받을 수 있다는 믿음에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선거가 남긴 첫 번째 교훈은 매우 상식적이다. 선거에서 당락을 결정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그 절차적 정당성이며, 그 정당성에 대한 손톱만큼의 의구심도 매우 치명적이라는 점이다. 그 이유야 어찌됐건 잠실을 비롯한 수십개의 투표소에서 투표용지가 부족하여 상당수의 시민들이 참정권을 훼손당했다는 점은 한국 선거사의 큰 오점으로 기록될 것이다. 셰보르스키식으로 말한다면, 선거는 단순히 권력을 선택하는 절차가 아니라 불확실한 미래를 함께 감당하겠다는 사회적 약속인데, 이를 참정권 제한을 받은 이들에게 요구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의도되고 기획된 선거부정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선거부정이란 선거에서 누군가(주체)가 특정 방법(수단)을 통해 특정 방향(의도)으로 선거 결과를 왜곡하는 것인데, 이번의 투표용지 부족 사태는 주체와 의도, 그리고 수단이 일관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선거부정이 아니더라도 선관위가 무능의 책임을 피하기는 어렵게 되었고, 이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이번 선거의 두 번째 교훈은, 위에서 언급되었지만 “누구나 선거에서 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대통령의 높은 지지율, 아직도 생생한 계엄의 기억, 야당의 분열상을 본다면, 이와 일치하는 여론조사들을 고려한다면선거는 여당에 매우 유리한 상황으로 이해됐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혹자는 부동산을, 혹자는 공소취소를, 혹자는 청년의 ‘보수화’에서 그 이유를 찾는다. 그러나 이에 추가적으로 정치학 문헌은 유권자들이 다양한 수단으로 정치적 균형점을 찾아가는 경향이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우리 식으로 표현한다면 대선과 총선을 한 정당이 승리하였으니, 지방선거에서는 견제심리가 강하게 작동한다는 것이다.
이번 선거가 남긴 세 번째 교훈은, 한국 선거에서는 변화의 동인만큼이나 강력한 복원력이 존재하며, 그 복원력의 이름은 대립적 양당제라는 점이다. 이번 대구시장 선거에서 낙선한 김부겸 후보의 경우를 생각해본다면 이 점이 더 명확해진다. 김 후보가 제6회 지방선거에서 40%를 얻고 낙선한 것이 12년 전의 일이지만, 그사이 2명의 대통령이 탄핵되고 본인은 대구 수성구 국회의원과 국무총리의 경험을 쌓았다. 대구 시민들이 호응하고 이번에는 바꿔야 한다는 목소리가 선거 현장에서 상당히 컸음에도, 김부겸 후보는 45%를 얻어서 낙선한 것이다.
그 5%의 전진에 대해 누가 감히 폄하할 수 있을까. 그러나 변화의 열망과 징후가 컸던 만큼 한국 정치를 지배하는 강력한 복원력에 대해 이제 말할 수밖에 없다. 양대 정당으로 나뉘어 중도나 제3의 대안에 대한 일말의 가능성도 없이 다투는 곳에서, 유권자들이 변화를 감지하고 그것을 표로 전환하는 일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양대 정당에 가장 효과적인 선거전략은 후보 개인에 대한 선거운동이 아니라 상대 정당을, 대통령을, 전직 대통령들을 내세우고, 생존을 호소하는 일이었다. 여기에 지방이, 그리고 정책이 들어설 틈은 조금도 없었다.
기억해야 할 것은 항상 다음 선거가 기다리고 있다는 점이 아닐까. 비록 우리는 동의하지 못하지만 결국 같은 투표함 앞에 줄을 서고, 같은 규칙을 받아들이며, 같은 미래를 나눌 수밖에 없는 숙명이라는 점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민주주의는 승리의 환호 속이 아니라 패배를 견디고 다음을 기약하는 시민들의 침묵 속에서 완성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박원호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