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개최된 미·중 정상회담의 최대 화두는 중국이 제안한 ‘건설적 전략 안정 관계’였다. 역사적으로 ‘전략적 안정성’은 냉전기 미국과 소련, 미국과 러시아 간의 양자적 핵억제 이론, 즉 상호확증파괴(MAD)의 맥락에서 태어난 강대국 전유의 언어다. 위기의 순간에서도 어느 한쪽이 먼저 방아쇠를 당길 구조적 유인을 갖지 않는 상태를 뜻하는 이 고도의 군사안보 개념을 중국은 전면적으로 미·중 양자관계의 중심축으로 끌고 왔다. 그러나 이 합의는 진정한 화해라기보다 ‘안정’이라는 단어의 정의와 규칙을 둘러싼 치열한 담론 경쟁의 시작을 의미한다.
전략적 안정성의 첫 번째 본질은 ‘상호 취약성의 인식’에 기반한다. 상대의 선의가 아니라 위협적 유인 구조를 통제하는 이 개념은, 결코 수직적이거나 우열 관계로 성립될 수 없다. 중국이 제안한 ‘건설적 전략 안정’ 역시 미·중 간의 상호 취약성을 인정한 토대 위에서 경쟁을 관리하자는 전략적 요구다. 각국이 이해하는 전략적 안정성은 상대의 공격·방어 무기가 기존의 균형을 깨고 취약성을 극대화할 때 강한 위협 인식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가령 미국의 미사일방어(MD)나 정밀타격 우위와 같은 공격·방어 무기의 증강은, 상대(중·러·북)의 전략적 취약성 인식을 역설적으로 강화해 위기 시 선제 사용 압박을 키우고 평시의 군비경쟁을 부추기는 악순환을 낳는다.
미·러·중의 인식은 철저히 자국이 직면한 취약성의 렌즈를 통과한다. 미국의 안정성은 경쟁국을 자신이 감당하고 통제할 수 있는 구도 내에 묶어두려는 시도인 반면, 러시아의 용법은 미국에 의해 핵심 지휘통제(NC3)와 보복 능력이 무력화될 수 있다는 취약성 인식에 기초한다. 따라서 러시아는 핵과 비핵, 방어와 지휘통제를 아우르는 균형 속에서 미국의 공세적 행동을 상쇄하려 한다. 미·중이 마주한 안정성 역시 본질적으로 비대칭적 취약성을 조율하려는 장기 지구전이다. 중국은 미국의 정밀타격망과 공급망 배제가 자국의 생존권과 체제를 위협한다는 인식하에 대만 레드라인을 사수하려 들고, 미국은 중국의 핵심 광물 통제와 시장 접근성 제한이 자국 제조업 생태계의 취약성을 파고든다고 보아 검증 가능한 단기 경제 성과로 상대를 강제하려 한다.
주목할 점은 이제 전략적 안정성이 강대국만의 전유물이 아니란 것이다. 북한 역시 이 담론을 활용, 핵보유국 위상을 투영하는 동시에 동북아 역내 전략적 지위를 제고하는 레버리지로 삼고 있다. 북한식 전략적 안정성은 선제타격 압박과 취약성을 상쇄하려는 ‘대미 억제의 안정성’, 동북아에서 미국 핵 우위를 견제하며 핵보유국가의 위상을 제고하는 ‘전략적 지위의 안정성’, 그리고 다극화 질서에 편승하려는 ‘글로벌 공존의 안정성’이라는 삼중 구조로 전유돼 자국의 군사행동을 정당화하는 서사로 활용하고 있다.
오늘날의 취약성은 단순한 군사 역량의 불균형으로만 나타나지 않는다. 반도체, 배터리, 핵심 광물 등의 공급망이 평시의 강압 수단인 ‘디지털 탄약’으로 전화하는 경제전이군사안보의 토대를 뒤흔들고, 민간의 인공지능(AI) 및 우주·사이버 자산이 군사기술과 결합하면서 평시와 전시의 문턱을 해체한다. 이 다중적인 얽힘 속에서 사이버 공격에 의한 지휘통제 마비나 공급망 무기화 같은 비군사적 갈등이 재래식 단계를 건너뛰고 전략적 수준으로 비선형적으로 도약하는 ‘확전’의 위험이 구조화되고 있다.
이 다층적인 취약성의 격전지 한복판에 놓인 행위자가 바로 한국이다. 한국은 비핵국가이지만 주요 핵국가들의 전략적 종심과 다영역 군사기술 경쟁의 한가운데에 대상화돼 있다. 외교·경제적 복합위기와 군사적 확전 경로가 공급망의 길목에서 실시간으로 동기화되고 있는 현 상황에서 우리의 정책 환경은 이러한 구조적 변화를 읽고 있는지 자문이 필요하다.
우리도 결국 이들 전략적 프레임의 수동적 흡수자 지위에서 벗어나, ‘우리의 렌즈와 스케일, 내러티브’를 투사한 대전략으로서의 ‘한반도형 전략적 안정성’ 모델 정립이 시급하다. 이는 단순히 군사적 억제력의 산술적 강화에 매몰되는 것이 아닌, 위기·군비경쟁·교차영역·연루·공존이라는 5대 불안정 구조와 다중적 취약성을 능동적으로 인식하고 대응하는 역량이어야 한다. 미·중의 해석 투쟁 속에서 우리의 산업 안보와 지정학적 이해를 선제적으로 반영한 정교한 인식 메커니즘을 수립해야 한다. 위협 감소에 기반한 한반도형 안정성의 사다리를 우리가 능동적으로 제시해야 할 때다. 안정은 주어지는 환경이 아니라, 취약성을 인식하고 구조를 설계하는 자의 서사다.
홍민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